EP 01 / 01
어서 오십시오
# 01. 어서 오십시오
대서고의 아침은 늘 종이 냄새로 시작되었다.
숙은 서가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어긋난 책 한 권의 등을 제자리로 밀어 넣었다. 높은 창에서 빛이 비스듬히 내려와, 먼지가 그 결을 따라 떠다녔다. 그는 먼지를 쓸지 않았다. 먼지조차 이 서고에 머무른 시간이 있다고, 그렇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걸음이 마지막으로 멈추는 곳은 늘 같았다. 카운터 뒤편, 오래전부터 비워 둔 서가 한 칸. 분과장 자리가 비어 있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빈자리 — 다섯 번째 사람의 자리였다. 십수 년째 비어 있었지만, 숙은 그 칸을 한 번도 다른 책으로 채우지 않았다.
그 칸의 가장 왼쪽에는 책 한 권이 진작 꽂혀 있었다. 입문자가 처음 펼치기 좋은, 가장 얇고 가장 친절한 책으로. 누가 올지 모르던 때부터 그 자리는 그렇게 갖춰져 있었다. 숙은 매일 아침 그 책등을 한 번 쓸었다. 언젠가 올 누군가의 몫을 미리 비워 두는 것이,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빗물을 머금은 신발이 바닥에 옅은 자국을 남기며 다가왔다.
숙은 그 발소리가 카운터에 닿기 전에, 이미 장부를 펼쳐 두었다.
전령이 봉투를 내밀었다. 분과 배정에 쓰이는 청색 밀랍이 봉인되어 있었다.
"…흐음."
숙은 봉투를 받아들며, 전령의 젖은 어깨를 한 번 보았다.
"수고하셨습니다. 비 오는 길을 마다 않으셨군요. 신 자국이 아직 마르지 않았으니 — 가시기 전에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두고 가시지요. 어차피 길은 그대로 질 테니까요."
전령은 잠깐 머뭇거리다, 차는 사양하고 고개만 숙이고 물러났다. 그래도 어깨가 조금 풀린 걸음이었다. 손님을 빈손으로 보내지 않으려는 사서의 인사를, 빗속을 걸어온 사람은 대체로 마다하지 않는다.
봉투 안에는 짧은 통보 한 장. 새 이등 대원 하나가 학술과 베리타스로 배정되었다는, 그것뿐이었다. 이름이 적힐 칸에는 아직 인번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수료식에서 석판이 인번을 새기기 전까지는, 그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순서였다.
숙은 그 빈칸을 잠깐 들여다보았다. 아직 번호도 이름도 없는 사람. 그러나 자리는 이미 거기 있었다 — 오래전부터.
그는 통보를 장부 사이에 끼우고, 다섯 번째 칸의 책등을 다시 한 번 쓸었다. 그리고 책 옆에 작은 찻잔 하나를 올려 두었다. 첫날, 목이 마를지도 모르니까.
"…오늘이었군요."
혼잣말은 짧았다. 숙은 다시 카탈로그 정렬로 돌아갔다. 손끝은 늘 그렇듯, 한 번도 헛돌지 않았다.
소식이 대서고를 한 바퀴 도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요란하게 반응한 것은 대서고 구석의 '헤븐워커 홍보실'이었다. 팻말은 여전히 비뚜름했고, 책상 위에는 펜과 수첩과 식어 가는 커피, 그리고 다크러시안 블루 한 마리가 단정히 앉아 있었다.
"먼지야. 이건 홍보실 대외비인데…"
츄니티가 고양이를 향해 목소리를 낮췄다. 먼지는 꼬리를 한 번 까딱했다.
"다섯 번째가 온대. 베리타스에. 십수 년 만이야."
그녀는 수첩을 펼쳐 빠르게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첫 인사, 첫 표정, 좋아하는 차, 첫날 펼친 책, 긴장했을 때 손버릇 — 전부 받아 적을 거야. 창간 이래 최대 특집이라고. 제목은… '베리타스, 다섯 번째 자리'. 1면 통째로 비워 뒀어."
먼지가 길게 하품을 했다.
"…너, 지금 '또 무리한다' 그 표정이지?"
먼지는 대답 대신 앞발을 핥았다.
"지난번 '대서고 괴담 특집' 때 일은… 그래, 인정해. 노아 씨가 서가에서 안 보인다고 실종 기사를 냈다가, 정작 본인이 바로 옆 서가에 계셨던 건 좀… 그건 정정 보도 냈잖아."
츄니티의 펜이 잠깐 멈췄다. 그녀의 수첩에는 동료들의 사소한 하루가 빼곡했다. 하세운이 작전 중 세 번 웃은 날, 노아가 서가에서 한나절 사라진 날, 유라가 사흘 만에 돌아온 날. 누가 보면 시시하다 할 기록이었다.
하지만 츄니티는 안다. 적어 두지 않으면 사라진다는 걸. 한 번, 그렇게 잃을 뻔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새 페이지의 첫 줄은, 아직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비워 두었다.
"좋아. 취재 준비 끝. 먼지, 같이 가자. 일단 노아 씨부터 찾아야지. 분명 뭔가 알고 있을 거야."
먼지는 따라오지 않았다. 고양이는 늘 자기가 내킬 때만 움직였다.
"…너도 참 베리타스답다."
정오 무렵, 젖은 망토가 현관에 걸렸다.
유라가 돌아왔다. 사흘간의 순례. 등에는 키만 한 도끼가 메여 있었고, 망토 자락에서 빗물이 떨어졌다. 그녀는 본진에 오래 머무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멀리 도는 것이 절반은 임무였고, 절반은 거리였다. 가까이 있으면 정이 들고, 정이 들면 잃을 것이 생기니까.
카운터 앞에 보고서를 내려놓는데, 숙이 이미 다른 서류 한 묶음을 내밀고 있었다.
유라의 손이 잠깐 멈췄다.
"…배정 서류는 제가 아직 청하지도 않았는데요."
"청하실 예정이었으니까요. 어차피 동선 안입니다."
"…음."
유라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숙은 늘 그녀가 무엇을 물을지 알고 답을 먼저 꺼내 두는 사람이었고, 그건 편리하면서도 가끔은 김이 빠지는 일이었다. 한 번쯤은 그녀가 먼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틈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벨바스트 동쪽이셨지요."
숙이 보고서 표지를 흘긋 보며 말했다. 표지 모서리에 묻은 붉은 진흙은 그쪽 강기슭에서만 나는 빛깔이었다.
"…네. 사흘."
"비가 일렀던 모양입니다. 돌아오시는 길이 평소보다 반나절 늦으셨으니."
"…그것도 진흙으로 아셨습니까."
"신발이 말해 주더군요."
유라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물어봐야 또 어딘가의 흔적이 답을 대신할 테니까.
그녀의 시선이 서류 위에 머물렀다. 새 대원의 숙소 배정란. 거기 적힌 동 번호가, 그녀의 방과 같은 복도였다.
"…이 배정, 누가 했습니까."
"행정부 몫입니다만, 같은 복도를 청한 건 접니다. 첫날 혼자 두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유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같은 복도라는 건 매일 마주칠 자리였고, 매일 마주치면 정이 드는 자리였다. 그 끝이 어떤지를 그녀는 안다.
그런데도 서류를 물리지는 않았다.
창밖에서 빗소리가 한 결 굵어졌다.
*투둑.*
그 소리에 유라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비는 늘 그녀의 경계를 느슨하게 했다.
"…비가 오네요."
"질척한 길, 수고하셨습니다. 숙소에 마른 수건을 미리 가져다 두었습니다."
"…그것도 동선 안입니까."
"예."
"…숙 씨는 가끔 너무 멀리까지 동선을 잡으시는 것 같아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유라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 안쪽으로 사라졌다.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간 것 같기도 했지만, 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노아를 찾는 일은, 늘 그렇듯 쉽지 않았다.
"노아 씨—?"
츄니티가 7번 서가 앞에서 두리번거렸다. 분명 여기 있다고 들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서가 사이는 미로처럼 깊었고, 노아는 그 미로에 스며드는 데 재능이 있었다.
"노아 씨, 취재 좀… 어디 계세요? 또 이러기예요?"
그녀가 서가 모서리를 막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히윽—!"
바로 옆 서가 그늘에서 목소리가 났다. 노아가 안내 도면을 든 채,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를 얼굴로 서 있었다. 안경 너머의 옅은 미소는 친절인지 거리감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노아 씨. 진짜. 그 등장 좀 어떻게 안 돼요? 심장에 안 좋다고요."
"여기 있었습니다. 줄곧."
"그게 더 무섭다니까요."
"찾으시는 동안 두 번 지나치셨습니다. 두 번째에는 제 어깨를 스치셨고요."
"…그걸 왜 그때 말 안 했어요!"
"말을 거실 줄 알았습니다."
츄니티가 항변하려다 포기했다. 노아는 대답 대신 도면을 펼쳐 보였다. 대서고의 길이 처음 오는 이의 걸음에 맞춰 그려져 있었다. 첫날 펼치기 좋은 책의 위치, 헤매기 쉬운 모퉁이, 빛이 잘 드는 열람석.
"새 대원이 오면, 가장 먼저 길을 물을 겁니다. 그 답을 정리해 두는 중이었습니다."
"…그거 1면에 실어도 돼요? '베리타스의 길잡이, 노아 대원의 비밀 지도'."
"확인되지 않은 제목입니다."
"그럼 확인해 주세요."
"…현재로선 불확실합니다."
"노아 씨는 매번 그렇게 빠져나가시더라."
노아는 옅게 웃으며 도면의 한 귀퉁이를 손끝으로 짚었다. 거기에는 다른 글씨보다 작게, 한 줄이 덧붙어 있었다.
*— 모르는 길이면, 함께 가면 됩니다.*
츄니티는 그 줄을 한참 보았다. 그러고는, 드물게도 수첩을 도로 덮었다.
"…이건 안 적을게요. 적기 아까운 것도 있으니까요."
"기자답지 않으시군요."
"이건 홍보실 대외비예요."
해가 기울 무렵, 정원에는 이미 츄니티가 있었다.
생활 구역 안쪽, 수정샘이 은은히 빛나는 그곳은 츄니티가 매일 이맘때 커피를 마시러 오는 자리였다. 노아가 도면을 챙겨 그 뒤를 따랐고, 유라가 무장을 풀고 샘 가장자리에 앉았다. 숙은 가장 늦게, 찻주전자를 들고 들어섰다. 마침 그 시간에 차를 우렸을 뿐이라는 듯한 걸음으로.
그는 잔을 하나씩 돌렸다. 츄니티 앞에는 커피 대신 옅은 차를 놓았다.
"…이거 커피 아닌데요."
"밤을 새우셨더군요. 오늘은 일찍 주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기사는 그분이 오신 뒤에 써도 늦지 않으니까요."
"특집 호 마감이 있단 말이에요."
"마감은 늘 있었고, 늘 넘기셨지요."
"…그건 대외비인데."
유라가 짧게 웃었다.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한동안, 차 따르는 소리만 정원에 낮게 깔렸다. 말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였다.
먼저 입을 연 건 츄니티였다.
츄니티가 턱을 괬다.
"그나저나, 어떤 분일까요. 전투형일까요, 연구형일까요? 베리타스니까 책벌레였으면 좋겠는데. 같이 밤새울 사람 하나쯤 있으면 좋잖아요."
노아가 잔을 들여다보았다.
"통계로는 연구 적성이 높을 겁니다. 다섯 분과 중 베리타스 배정 비율이 가장 낮으니까요. 흔치 않은 적성이라는 뜻이지요."
"오, 그거 1면 감인데."
"…추정입니다."
"유라 씨는요? 어떤 분일 것 같아요?"
"오면 알겠죠."
"…유라 씨는 진짜 기삿거리를 안 주신다니까."
숙이 옅게 웃었다.
"기삿거리가 없는 게 아니라, 굳이 먼저 펼치지 않으시는 것뿐이지요. 책처럼요."
"그거 좋다. 적어도 돼요?"
"…굳이 막지는 않겠습니다."
"그래서, 환영회는 어떻게 할까요? 저는 거하게 하고 싶은데. 현수막도 걸고, 1면 호외도 뿌리고, 분과 입구에 폭죽도—"
유라가 잔을 내려놓았다.
"폭죽. 안 됩니다."
"왜요!"
"위험해요."
"…유라 씨는 너무 실무적이에요."
숙이 거들었다.
"조용한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처음 온 사람에게 현수막과 폭죽은 — 다소 도망치고 싶은 풍경일 수도 있으니까요. 등 뒤에서 무언가 터지면, 누구든 한 번은 몸을 움츠리지요."
"두 분 다 너무 빡빡하시다…"
노아가 끼어들었다.
"차 한 잔이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첫날은, 길을 아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족하니까요. 나머지는 천천히 확인해도 됩니다."
츄니티가 펜을 만지작거렸다.
"그건 좀 노아 씨다운 말이네요. 그럼 절충. 현수막이랑 폭죽은 빼고, 대신 제가 첫날 기록은 남길게요. 작게. 1단짜리로. 사진도… 아, 사진은 본인 허락 받고요."
"그 정도라면."
숙이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마른 수건이랑 식권이면 됐어요."
유라가 보탰다.
"전 길이면 됩니다."
노아도 덧붙였다.
"…다들 너무 베리타스다워."
합의는 그렇게, 차 한 잔이 식기도 전에 끝났다. 거창한 환영도, 차가운 무관심도 아닌, 딱 네 사람만큼의 환영이었다.
유라는 샘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빛이 물 위에서 흔들렸다. 그녀는 비워 둔 자리 쪽으로 시선을 한 번 두었다가, 거두었다. 평소라면 닿기 전에 거두었을 시선이, 오늘은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오래 버텨 줬으면."
아무에게랄 것도 없이, 낮은 한마디였다. 누구도 캐묻지 않았다. 다만 숙은, 가까이 두기를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방금 무슨 말을 흘렸는지 알았다.
"그러라고 우리가 있는 것이겠지요."
숙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손님이 오시면, 발소리를 먼저 세어 두는 편이 좋으니까요."
"또 발소리예요?"
"어차피 동선 안이니까요."
츄니티가 웃었고, 노아도 안경을 밀어 올리며 따라 웃었다. 유라는 웃지 않았지만, 잔을 든 채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각자의 준비가, 정원의 빛 속에 잠깐 겹쳤다가 흩어졌다.
해가 완전히 기울 무렵, 분과 현관에 빛이 번졌다.
*웅—.*
전이 마법진이 깨어나는 소리였다. 낮고 긴 진동이 복도를 타고 대서고까지 닿았다.
숙은 정렬하던 손을 멈추고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라가 복도에서 나왔다 — 손에는 새 대원에게 건넬 식권 한 묶음, 그리고 잘 마른 수건 한 장. 떨어져 서 있기를 택해 온 사람이, 오늘은 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노아가 도면을 들고 섰다. 츄니티는 수첩을 가슴에 안은 채 홍보실에서 튀어나왔다. 그 뒤를, 이번에는 먼지가 따라왔다. 고양이도 가끔은 자기가 내킬 때 움직였다.
마법진의 빛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 빛이 다 꺼지면, 그 자리에 한 사람이 서 있을 것이었다.
준비는, 갖추는 일이 아니었다. 갖추어 두고도 끝내 조금은 두려운 채로, 그래도 문을 향해 걸어 나가는 일이었다.
*콰앙—*
빛이 꺼졌다.
현관에 한 사람의 숨소리가, 아직 닫히지 않은 문틈으로 흘러들었다.
그 윤곽이 채 또렷해지기도 전에, 숙이 먼저 한 걸음 나섰다.
"…오셨군요."
낮고 나른한 목소리가, 식어 가는 빛 위로 내려앉았다.
"길이 질어 늦으실까 했습니다. 자리는 오래전부터 비워 두었습니다. 아직 번호도 이름도 정해지지 않으셨더군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 서고에서는, 아직 이름이 없는 것도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그가 한 호흡 쉬고, 나직이 그러나 분명하게 맺었다.
"어서 오십시오. 베리타스에."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나머지 셋의 발소리도 현관으로 모여들었다.
뒤늦게, 어디선가 먼지가 야옹, 하고 울었다. 마치 자기 몫의 환영도 빼먹지 말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