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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01 / 01

먼저 닿는 쪽

# 같은 창, 다른 불꽃

> 「먼저 닿는 쪽」

푸른 묘지에는 바람이 없다.

내가 그렇게 지어 두었으니까. 바람은 먼지를 옮기고, 먼지는 기록을 갉는다. 그래서 이 가상의 서고에는 공기조차 흐르지 않고, 다만 끝이 보이지 않는 서가 사이로 파란 빛이 비스듬히 고여 있을 뿐이다. 책등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기억이고, 그 사이를 메운 침묵이 곧 이곳의 온도였다.

오늘은 그 서가 한가운데를, 비워 두었다.

대련을 위해 책을 치운 것은 아니다. 치울 책 따위는 없다. 다만 한 사람이 마음껏 부서져도 좋을 만큼의 공터가 필요했고, 나는 제3서가의 한 구획을 통째로 열어 평평한 돌바닥으로 다시 그려 두었다. 돌의 결까지. 오래 쓴 것처럼.

허공에 파란 줄이 한 칸 떠올랐다.

「 색인 완료. 푸른 묘지 제3서가, 대련 구역을 전개합니다 」

손가락을 가볍게 쓸어 글자를 넘겼다. 다음 항목.

「 페인 업소버: 5단계. 통각 100%. 무결성 검증 완료 」

흐음.

다섯 단계. 통각을 한 톨도 깎지 않았다. 베이면 베인 만큼 아프고, 부러지면 부러진 만큼 비명이 나오도록. 죽음만이 이 안에서 거두어질 뿐, 그 직전까지의 모든 고통은 정직하게 도착할 것이다.

손대중은 없다.

그렇게 청한 것은 내가 아니었지만, 막을 이유도 없었다. 막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내게는 가장 흔한 형태의 동의다.

"숙 대원."

서가 너머에서 목소리가 왔다. 낮고, 군더더기가 없는. 입회석에 앉은 총대장은 이 가상 안에서도 굳이 빛을 두르지 않았다. 그저 거기 있었고, 보고 있었다.

"정말 다섯으로 두는 겁니까."

"두 분이 청하셨으니까요."

"내가 묻는 건 절차가 아닙니다."

나는 잠깐 손을 멈추었다. 카탈로그 카드를 정렬하던 버릇이, 가상 안에서도 손끝에 남아 있었다.

"걱정하시는 건, 제가 아니라 이 서버겠지요."

"……"

"괜찮습니다. 어차피 동선 안이니까요."

총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거짓을 가려내는 사람이고,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다만 다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 둘의 차이를 그가 모를 리 없었지만, 그는 오늘만은 그 차이를 짚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빛을 넘겼다. 마지막 항목을 불러왔다.

「 전투 기록 열람 — 녹턴 분과장. 권한: 관리자 」

파란 글자 아래로, 한 사람의 싸움이 펼쳐졌다.

기록은 정직했다. 갑주를 입고도 마찰음 하나 없는 걸음, 시선을 감추는 반쪽짜리 가면, 푸른 화염을 던진 직후 이미 사각에 가 있는 몸. 미끼와 참수. 그가 어떻게 싸우는지를, 나는 이미 한 권의 책처럼 읽어 둔 상태였다.

그런데도, 나는 이 책을 다 안다고 말하지 못한다.

기록은 그가 *했던* 것이다. 그가 *할* 것은 기록에 없다. 그리고 엑타르 대원의 몸은, 늘 기록보다 빨랐다. 다른 대원이라면 나는 그들이 둔 수를 끝까지 읽고, 그 끝에 미리 가 앉아 차를 우려 두었을 것이다. 엑타르 대원은 — 내가 읽은 그 자리에, 내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도착해 있곤 했다.

그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나는 아직 적당한 분류를 찾지 못했다.

흐음.

분류되지 않는 책이, 사서에게는 가장 오래 손이 가는 책이다.

향냄새가 없는 것이 가장 먼저 거슬렸다.

의식의 성소에서라면 유향나무 진액과 밀랍 냄새가 먼저 났을 것이다. 작전 전, 나는 늘 그 냄새 속에서 무릎을 꿇고 짧게 기도한다. 그러나 이 가상의 서고에는 종이 냄새조차 없었다. 죽은 공기. 한 번도 살아 본 적 없는 공기.

나는 카에룰루스 플람메를 고쳐 쥐었다. 창몸통 안에서 카트리지가 묵직하게 가라앉는 감각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적어도 창은 진짜처럼 무거웠다. 수석사서는 이런 것까지 정직하게 만들어 두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기도부터 올리기로 했다. 한쪽 무릎을 꿇었다.

"라이미라크를 위하여."

짧게. 그것으로 충분했다. 일어서며, 나는 평소와 다른 무언가를 — 정확히는, 평소 *있어야 할* 무언가가 *없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냥의 감각이, 침묵하고 있었다.

이단을 쫓을 때, 나는 매개를 손에 쥐고 세 번의 문답을 마친다. 그러면 사냥감과 나 사이에 빛무리가 떠올라, 그가 어디에 숨든, 어느 함정 뒤로 돌든, 길을 일러 준다. 나는 늘 그 빛을 따라 걸었다. 먼저 보고, 먼저 정하고, 먼저 가 있는 싸움.

지금, 그 빛이 없었다.

수석사서는 이단이 아니다. 그를 쫓을 매개도 내 손에 없다. 그러니 내 사냥의 감각은 그를 사냥감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 앞에서 나는 — 처음으로, 어디로 갈지 일러 주는 것 없이 싸워야 했다.

낯설었다. 두렵다고는 하지 않겠다. 다만 낯설었다.

서가 사이, 평평한 돌바닥 위에 그가 서 있었다. 푸른빛이 도는 백발, 마른 몸. 한 손에 든 랜스는 별다른 이름도 없어 보이는, 쓰다 부러지면 버릴 작정인 물건. 그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나를 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닌 어딘가를 — 허공의 무언가를 —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허공에 대고, 그는 가끔 대답을 했다.

"……흐음. 그렇군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의 눈에만 보이는 무언가가 있고, 그것이 그에게 답을 건넨다. 그는 줄곧 그런 식으로 싸운다고 했다. 보이지 않는 책을 읽으며.

베이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다.

이상한 표현이라는 것은 안다. 베이지 않는 자는 없다. 그러나 그의 마른 몸에서는, 베일 자리를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늘 베일 자리에서 비켜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창을 내지를 자리를 미리 알고 그 옆 칸에 가 서 있을 것처럼.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그가 미리 알 수 없을 만큼 빠르게. 그가 비켜날 틈조차 남기지 않을 만큼.

"수석사서."

내가 입을 열었다.

"손대중은, 정말 없는 겁니까."

그는 그제야 나를 — 정확히 나를 — 보았다. 옅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인사치레의 웃음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뒤늦게 깨달은 자에게만 짓는, 혹은 상대가 곧 깨닫게 될 것을 미리 아는 자의.

"엑타르 대원께서 먼저 그렇게 청하지 않으셨습니까."

"확인한 겁니다."

"그럼 확인해 드리지요."

그가 랜스 끝을 가볍게 내렸다. 창끝에서, 아주 옅은 파란 불씨가 한 점 맺혔다가, 사라졌다.

"손대중은 없습니다. ……다만, 저는 오래 끌지 않는 편을 선호합니다. 책이 상하니까요."

입회석에서 총대장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시작하십시오."

엑타르 대원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너무 빨라 눈이 따라잡지 못한 것이었다.

*콰드드득—!*

뒷발이 돌바닥을 으깨며 그를 쏘아 보냈다. 첫 걸음에 거리의 절반이 지워졌다. 갑주를 두르고도 마찰음 하나 없이, 다만 짓밟힌 바닥만 비명을 질렀다. 두 번째 걸음에, 나머지 절반이.

마력으로 미는 돌진이 아니었다. 다리와 체중이 엔진인, 순수한 몸의 가속.

나는 그를 보지 않았다.

그가 올 자리를 보았다.

「 패스파인더 」

수만 갈래의 다음이 한꺼번에 펼쳐졌다가, 그중 단 하나, 내가 살아남는 파란 길만 남기고 접혔다. 창끝은 내 왼쪽 가슴. 그러나 닿기 직전 그는 창을 비틀어 목으로 올려 벨 것이다. 그 전에, 화염이 온다. 나는 그 화염을 보아서는 안 된다.

코끝에 붉은 기가 옅게 맺혔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왼손 엄지가 트리거를 훑었다.

「 스파이럴 볼텍스 」

*화르르륵!*

창끝의 추진이 나선으로 풀리며 푸른 화염이 부챗살처럼 펼쳐졌다. 열기가 먼저 뺨을 때렸다. 시야를 통째로 삼키고 귀를 멍하게 만드는, 무대의 조명. 보통의 적이라면 그 불꽃에 눈이 갔을 것이고, 눈이 간 그 한 호흡 사이에 목이 베였을 것이다.

나는 불꽃을 보지 않았다. 이미 그 너머, 그의 발이 디딜 빈 칸을 보고 있었으니까.

같은 기술을, 나는 정반대로 쓴다.

「 스파이럴 볼텍스 」

*지이이잉—*

내 창끝에서 풀린 나선은 화염이 아니었다. 마력을 뱉지 않고, 빨아들였다. 그의 화염과 흩날린 먼지와 부서진 빛을, 그리고 그 한복판으로 파고드는 그의 몸까지 — 한 점으로 접어 넣는 수렴. 그가 디딜 빈 칸이, 내가 접어 둔 자리와 정확히 겹쳤다.

그가 그 자리를 밟았다.

그리고 창이 왔다. 기록 그대로, 왼쪽 가슴에서 목으로 비틀려 올라오는 궤도.

나는 그 궤도의 바깥, 반 뼘 옆에 이미 내 창을 세워 두고 있었다.

「 포커스드 엣지 」

*까앙!*

그의 창대가 내 창날에 비껴 맞고 위로 튕겼다. 충돌의 힘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지만, 정면으로 받지 않았으므로 흘렀다. 받지 않고 흘린다 — 그것이 내가 그의 완력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다. 정면으로 받았다면 내 마른 팔이 먼저 부러졌을 것이다.

튕겨 올라간 창이 만든 빈틈으로, 나는 창끝을 짧게 밀어 넣었다. 갑주의 판과 판이 맞물리는 옆구리의 한 뼘. 거기, 쇠가 비어 있는 자리.

*푸욱.*

얕게. 살갗과 그 아래 한 마디만큼만.

붉은 것이 갑주 틈으로 배어 나왔다. 죽일 수를 낸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일러 주는 수였다. 당신이 디딜 자리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엑타르 대원의 몸이, 처음으로 멈칫했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가면 너머의 잿빛 눈에, 처음으로 무언가가 — 흥미라고 해도 좋고, 경계라고 해도 좋을 무언가가 — 떠올랐다.

"……먼저 와 계셨군요."

"어차피 동선 안이니까요."

나는 옅게 웃었다. 그 웃음이, 그를 한 번 더 멈칫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나의 싸움이다. 완력으로 미는 것이 아니라, 한 발 앞서 가 앉아 있는 것. 그가 아무리 빨라도, 그가 도착할 자리에 내가 먼저 의자를 놓아 두면, 그는 결국 내가 앉혀 둔 자리에 앉게 된다.

그렇게, 믿었다.

다음 순간까지는.

옆구리가 뜨거웠다.

베인 것은 아직 아프지 않았다. 통증은 늘 한 호흡 늦게 온다. 먼저 온 것은 이해였다. 그는 내가 디딜 자리를 알고 있었다. 창을 내지르기도 전에, 거기 먼저 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빛무리도 없이, 그는 나를 사냥하고 있었다.

좋다.

그가 일러 받은 그 자리에, 내가 없으면 된다.

물러서지 않았다. 베인 옆구리를 축으로 몸을 비틀어, 다시 한번 — 첫 진입보다 빠르게 — 파고들었다.

「 차지 어설트 」

*콰드득, 타다닥—!*

기록 속의 나라면 여기서 물러나 거리를 다시 잡았을 것이다. 그도 그것을 알 것이다. 그래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가 내 다음을 읽고 자리를 옮기려는 — 그 옮기는 동작의 한복판으로.

읽는 데에도 시간은 든다. 본 것을 몸으로 옮기는 데에는, 더.

나는 그 시간을 지우러 갔다.

세상이 한 줄로 좁아졌다. 그의 눈이 커지는 것이 보였다. 떠오르려다 만 입가의 웃음. 옮기려던 발이, 절반만 떨어진 그 찰나.

그가 먼저 보았다면, 나는 그보다 먼저 닿으면 된다.

*콰아앙—!*

창끝이 그의 어깨를 긁고 지나가, 등 뒤의 서가에 박혔다.

*우르르, 콰자작!*

서가가 무너졌다. 책이 — 누군가의 기억이 — 파란 가루로 터져 흩어졌다. 무너지는 책장의 무게가 먼지구름을 밀어 올렸고, 그 충격에 그의 백발이 흩날렸다. 처음으로, 그의 마른 몸에서 베일 자리가 드러났다.

목이 아니라 어깨. 빗나갔다.

그러나 그의 옷깃이 사선으로 갈라졌고, 그 아래 살갗에 붉은 자국이 그어졌다. 깊지 않았다. 그래도 —

처음으로, 그가 피를 흘렸다.

"……흐음."

그가 제 옷깃의 붉은 자국을 내려다보았다. 놀라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다만 들여다보았다. 잘못 분류된 책을 발견한 사서처럼.

"빠르시군요. 기록보다."

"기록은 지나간 것이니까."

나는 창을 고쳐 쥐었다. 옆구리에서 피가 흘렀지만, 상관없었다. 여기서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살아서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싸울 수 있었다.

아낌없이.

"수석사서. 한 가지 묻겠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당신은, 베이는 게 두렵지 않습니까."

그는 잠깐 나를 보았다. 그리고 흐트러진 백발을 손끝으로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두려운 것은 베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잊혀지는 것이지요."

그 한마디에, 나는 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잊혀지는 것. 그 말을, 나만큼 무겁게 듣는 자도 드물 것이다. 나는 평생 잊혀진 다섯 사람의 이름을 붙들고 살아왔으니까. 붙들었으나, 끝내 얼굴을 잃어버린 다섯을.

그런데 이 사내는, 잊혀지지 않기 위해 — 무엇을 하는가.

나는 곧 알게 되었다.

그가 빨랐다. 인정해야 했다.

기록 속의 엑타르 대원은 미끼를 던지고 사각으로 도는 사냥꾼이었다. 지금 내 앞의 그는, 미끼가 통하지 않자 미끼를 버린 사냥꾼이었다. 더 단순하게, 더 빠르게, 더 정직하게. 가장 강한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를 전부 버린.

속도.

그가 다시 왔다.

*타다닥—!*

이번엔 화염도, 군더더기도 없었다. 똑바로, 최단 거리로. 나는 패스파인더가 그어 준 길을 보았다 — 오른쪽으로 반 보 물러나 창대를 흘리는 길. 그 길을 분명히 보았고,

내 다리가, 눈보다 느렸다.

*까강—!*

흘릴 각을 잡을 틈이 없어, 정면으로 받았다. 창과 창이 정통으로 부딪친 충격이 손목에서 팔꿈치로, 어깨로 거슬러 올라와 — 이가 딱 부딪쳤다. 발바닥이 돌바닥을 긁으며 뒤로 밀렸다.

*드드득.*

반 보. 흘리지 못하고 정면으로 받으면, 마른 몸은 반 보를 내준다. 그 반 보를, 그는 놓치지 않았다.

*서걱!*

밀려난 그 틈으로 창끝이 허벅지를 갈랐다. 이번엔 옅지 않았다. 허벅지 바깥쪽이 뜨겁게 벌어지고, 더운 것이 무릎 안쪽까지 흘러내렸다. 디딜 때마다 그 자리가 욱신거렸다. 이제 내 오른다리는, 한 호흡 느려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한 호흡이, 그의 속도 앞에서는 영원이었다.

세 번째. 네 번째. 그는 같은 곳을 두 번 치지 않았다.

*치익!*

손등이 그어졌다. 창을 쥔 힘이 한 번 흔들렸다.

*까앙! 깡—!*

연이은 두 합을 받아냈지만, 받을 때마다 한 발씩 밀렸고, 밀릴 때마다 다음 길을 보면서도 그 길에 닿지 못했다. 패스파인더가 길을 선명하게 보여줄수록, 그 길에 닿지 못하는 내 몸이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본다는 것이, 이토록 무력한 적이 없었다.

코끝에서 윗입술로, 붉은 것이 흘러내렸다. 머리가 무거웠다. 한 갈래의 미래를 붙드는 일은 늘 이렇게 값을 치른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값을 치르면서도 — 지고 있었다.

*쩌엉!*

다섯 번째 합을 막아낸 충격에, 결국 등이 서가에 닿았다.

*콰직.*

등 뒤에서 책 몇 권이 떨어졌다. 물러날 곳이 없었다. 계산해서 물러난 것이 아니라, 밀려서.

이것은 내 싸움이 아니었다. 오래 버티는 힘겨루기, 순수한 속도의 교환 — 내가 가장 불리한 자리. 그는 그것을 알고, 정확히 그 자리로 나를 몰아왔다. 빛무리도 없이, 본능만으로.

흐음.

이것은, 곤란하군요.

그가 거리를 좁혔다. 이번에는 다른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창을 비스듬히 늘어뜨리고, 후드 아래 이마 어딘가의 표식에 — 옅은 회색빛이 번졌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기록에서 읽었다.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 인필트레이터즈 디스코드 」

발치에서 회색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세상이 — 닫혔다.

이것이 내가 가장 강한 자리다.

안개가 우리를 감쌌다. 회색의 구. 그 안에서는 바깥의 모든 것이 지워진다. 누가 들여다볼 수도, 누가 끼어들 수도, 누가 도울 수도 없다. 안개는 우리 둘을 제외한 모든 존재를 먹어 치우고, 세상에 오직 둘만 남긴다.

원래는 챔피언과의 일대일을 위한 빛이었다. 지금은, 외부의 모든 간섭을 끊는 빛이다.

나는 이 빛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이 안개를 펼친다는 것은,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나 스스로 끊는다는 뜻이니까. 도움을 청할 수도, 증원을 부를 수도 없다. 안개를 펼친 순간, 나는 이미 정했다.

혼자 끝낸다.

수석사서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늘 그를 따라다니던 그 보이지 않는 책을, 부르려는 듯이.

그 손이, 허공을 헛짚었다.

처음으로, 그의 평정에 금이 갔다.

그가 무엇을 잃었는지, 나는 정확히는 몰랐다. 다만 그가 *무언가에 기대어* 싸우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무언가가 이 안개 안에서는 그에게 닿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남은 것은, 그와 나. 그의 마른 몸과, 나의 속도.

나는 더 묻지 않고 들어갔다.

*타닥—!*

회색 안개 속에서, 카에룰루스 플람메의 푸른 불씨가 유일한 빛이었다. 그 빛을 따라 창이 그의 가슴을 향해 뻗었다.

*까앙!*

받아냈다. 그러나 안개 속에서 그의 눈은 절반쯤 길을 잃은 듯했고, 받아내는 창끝이 한 호흡 늦었다.

*깡! 깡! 까가강—!*

연속으로 몰아쳤다. 받고, 받고, 받다가 — 받지 못한 한 합이 그의 어깨 갑주를 긁고(*끼기긱*), 다음 합이 그를 다시 서가로 밀어붙였다.

*쾅!*

등이 서가에 처박혔다. 책장이 통째로 흔들리며 위에서 책이 쏟아졌다. 그는 쏟아지는 무게를 피하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코피가 그의 턱을 타고 돌바닥에 떨어졌다.

*뚝.*

이제 끝이 보였다. 한 합. 한 합이면 됐다.

책이 닿지 않았다.

색인이 죽었다. 로드가 끊겼다. 늘 내 곁에 떠 있던 파란 글자들이, 이 회색 안개 안에서는 한 자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서고의 사서이면서, 서고에서 잘려 나갔다.

「 색인 접속 끊김. 무결성 검증 불— 」

문장이, 끝맺지 못하고 흩어졌다.

이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매우.

나는 늘 데이터에 기대어 싸웠다. 상대의 기록을 불러오고, 그의 습관을 색인하고, 그가 둘 다음 수를 미리 책으로 받아 읽었다. 패스파인더가 길을 본다면, 데이터는 그 길에 이름을 붙여 주었다. 둘이 함께였기에, 나는 빠르지 않아도 빠른 자를 이길 수 있었다.

이제, 데이터가 없다.

남은 것은 패스파인더뿐. 머리를 짓이기는 두통과, 멈추지 않는 코피와, 한 갈래의 미래를 붙드는 일의 값. 그 값을, 이제 나는 버팀목 없이 혼자 치러야 했다.

무릎을 꿇은 채, 나는 쏟아진 책 더미에 손을 짚었다.

*까강! 깡—!*

위에서 창이 떨어졌다. 두 번, 세 번. 나는 무릎으로 선 채 받아냈고, 받을 때마다 팔이 더 깊이 꺾였다. 마른 팔로는, 위에서 내리꽂는 그의 체중을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쩌어엉—!*

네 번째 내리침에, 내 창이 휘었다. 보급형 랜스의 한계였다. 충격이 손바닥의 살갗을 찢고, 창대가 미끄러졌다.

그리고 바로 그때, 안개와 두통과 끊긴 색인이 한꺼번에 이 서고의 가장 깊은 곳을 흔들었고 —

서버가, 비명을 질렀다.

「 무결성 검증 재개— 보존 기록을 로드합— 」

「 ……로드합— 너희도, 결국, 불탄다 」

나는 숨을 멈추었다.

그 문장은, 내가 쓴 것이 아니었다.

이 서고의 정상 출력은 짧고 건조하다. 열람, 색인, 보존, 로드. 감정을 담지 않는다. 그러나 방금 그 마지막 한 줄에는 — 증오가 끼어 있었다. 이 서고의 가장 깊은 칸에 오래 눌러 둔 무언가가, 안개에 갇혀 과부하된 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 서고에서 오직 나만이 안다. 그리고 그것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위험 신호였다.

엑타르 대원의 안개가, 나를 바깥에서 끊은 것만이 아니었다. 나를 이 서고와 함께 가두었고, 그 고립이 내가 평생 눌러 온 것의 빗장을 함께 흔들었다. 이대로 두면, 곧 정상 출력과 그 너머의 경계가 무너진다. 그러면 이 대련은, 더 이상 손대중 없는 훈련이 아니라 — 손쓸 수 없는 사고가 된다.

끝내야 했다. 이겨서가 아니라, 닫기 위해서.

휘어진 창을 짚고, 나는 처음으로 눈을 감았다.

데이터가 없다면, 데이터 없이.

빠르지 못하다면, 빠를 필요가 없는 단 한 점에서.

나는 수만 갈래를 다시 펼쳤다. 두통이 머리를 쪼갰다. 코피가 턱을 타고 떨어졌다. 그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단 하나의 — 내가 살고, 그리고 이 사고를 닫을 수 있는 — 파란 길 하나를 붙들었다.

그 길은, 좁았다.

종이 한 장만큼.

「 패스파인더 」

눈을 떴다.

엑타르 대원이, 창을 치켜들고 있었다. 마지막 한 합을.

그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그가 무언가를 정했다는 것을. 무릎을 꿇고, 피를 흘리며, 휘어진 창을 짚은 채 — 그런데도 그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고요해졌다. 막다른 곳에 몰린 자의 눈이 아니라, 막다른 곳에서 단 하나의 문을 찾아낸 자의 눈이었다.

사냥꾼의 본능이 일러 주었다. 지금이다. 그가 그 문을 열기 전에.

나는 치켜든 창에, 가진 전부를 실었다.

그는 늘 내가 베일 자리를 먼저 보고, 그 옆의 빈 칸에 가 서 있었다. 비켜서는 자. 흘리는 자.

그렇다면, 비켜설 빈 칸을 남기지 않으면 된다.

트리거를 끝까지 눌렀다. 끝의 끝까지. 카에룰루스 플람메의 카트리지가, 한꺼번에 터졌다.

「 오버 드라이브 」

*쿠구구궁—!*

게워 낸 푸른 화염이, 창끝이 아니라 내 앞의 세상 전부로 부풀었다. 한 점을 끊는 불꽃이 아니었다. 서가도, 돌바닥도, 그가 설 법한 모든 자리를 한꺼번에 삼키는 화염의 벽. 결전기. 정밀을 버린, 가장 묵직한 한 수.

열기가 회색 안개를 통째로 밀어냈다. 안개가 푸르게 끓어올랐다.

비켜설 칸은, 없다.

이제 그가 아무리 먼저 보아도, 물러설 자리가 없다.

빈 칸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가 게워 낸 화염이 내 앞의 모든 자리를 지웠다. 왼쪽도, 오른쪽도, 물러설 뒤도. 패스파인더가 늘 찾아 주던 '비어 있는 한 칸'이, 이번에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내가 비켜선다는 것을 알았고, 비켜설 곳 자체를 태워 없애는 것으로 답했다.

……영리한 분이군요.

그러나 단 하나, 그조차 지우지 못한 자리가 있었다.

화염이 가장 얇게 갈라지는 한 점. 제 무게로 부풀어 오른 폭발이 잠깐 제 안으로 비는, 반 호흡짜리 이음매. 거기. 살아남는 단 하나의, 종이 한 장 너비의 길.

나는 그 길로 무릎을 틀었다. 빠르게 움직여서가 아니라, 그가 트리거를 끝까지 누르던 그 순간부터, 내 무릎이 이미 그 이음매를 향하고 있었기에.

그리고 같은 자리에, 나는 내 전부를 모았다. 압축한 셸을, 수렴시킨 마력을, 창끝의 푸른 불꽃을 — 한 점으로 접어.

필살기는 아껴 둔 것이 아니라, 이 한 점을 위해 미뤄 둔 것이다.

「 어나이얼레이션 」

*쿠우우웅—!*

두 개의 묵직한 것이, 한 점에서 만났다.

그의 화염은 바깥으로 터지고, 나의 압축은 안으로 빨아들였다. 폭발과 수렴이 같은 자리에서 부딪치자, 대련 구역이 통째로 비명을 질렀다.

*쩌저저적—! 콰르릉!*

서가가 가루로 솟구쳤다가, 그 가루째 한 점으로 빨려들었다. 돌바닥이 갈라지고, 갈라진 조각마저 빛으로 풀려 빨려들었다. 충격파가 안개를 찢고 사방으로 퍼져나가 — 입회석의 총대장조차, 한쪽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 한복판.

그의 창이, 내 목을 지났다. 내가 *방금 전까지 있던* 자리를.

*서걱.*

목덜미의 살갗이 한 줄 갈렸다. 뜨거운 한 줄. 종이 한 장. 그만큼만 빗나갔고, 그만큼만, 내가 먼저 닿았다.

그리고 같은 찰나, 한 점으로 빨려든 모든 것의 중심에서 — 내 창끝의 푸른 불꽃이 그를 붙들었다.

「 푸른 불꽃 」

*지이이잉—*

불꽃은 그를 태우지 않았다. 태우는 대신, 압축했다.

그의 몸이, 그의 갑주가, 그가 쥔 창이 — 파란 육각의 결정체로 접혀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터졌던 그의 화염마저, 그를 따라 한 점으로 빨려들었다. 그의 잿빛 눈이, 마지막까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눈에 대고, 정중하게 말했다.

"영원히 기억되는 형태로 모셔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가장 아끼는 자에게 바치는 예우였다.

잊혀지지 않는 것. 영원히 보존되는 것. 한 톨의 기억도 잃지 않고, 내 서고의 가장 깊은 칸에 박제되어, 시간이 닿지 못하는 곳에 모셔지는 것. 나는 그것을,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것이라 믿었다.

엑타르 대원의 입술이, 결정체 안으로 접혀 들어가기 직전에 — 움직였다.

안 돼.

그 말이, 내 안에서 터졌다. 입 밖으로 나왔는지 안으로만 삼켜졌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베였어야 했다. 베여서, 풀려났어야 했다. 죽음으로서, 의무가 끝나는 것 — 그것이 내가 평생 맹세한 단 하나의 끝이었다. 영혼은 갇혀서는 안 된다. 갇힌 영혼을 풀어 주는 것이, 내 창이 하는 일이었다. 공허에 삼켜진 자들을, 나는 베어서 해방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갇히고 있었다.

태워지는 것이 아니라, 보존되고 있었다.

파란 결정체가 나를 접어 넣었다. 한 톨도 잃지 않고, 영원히. 잊혀지지 않도록. 그의 말대로, 영원히 기억되는 형태로.

그것이, 가장 끔찍했다.

나는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다. 잊혀진 다섯의 이름을 붙들고 살아온 자다. 그러니 영원히 기억되는 것은 — 내게 축복이어야 했다. 그가 그렇게 믿고 건넨 것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잊혀지지 않는 것과, 풀려나지 못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기억되기를 바랐지, 갇히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죽은 자는 쉬어야 한다. 풀려나야 한다. 그런데 이 사내는 — 누구도 쉬게 두지 않는다. 누구도 풀어 주지 않는다. 다만, 영원히 곁에 둔다.

이 사람은, 죽은 자조차 놓아주지 않는구나.

결정체가 닫히기 직전, 나는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다. 슬퍼 보이지 않았다. 기뻐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아끼는 책을 가장 안전한 칸에 꽂아 넣는 사서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나는 — 무서웠다.

세상이 파랗게 접혔다.

*툭.*

가상이 풀렸다.

회색 안개가 걷히고, 푸른빛이 잦아들고, 끝이 보이지 않던 서가가 다시 평범한 돌바닥의 대련 구역으로 돌아왔다. 박제는 박제로 끝났다. 그를 접어 넣은 결정체는, 가상이 거두어지자 함께 풀려났다.

엑타르 대원이, 돌바닥 위에 다시 서 있었다.

온전하게. 베인 자국도, 접혀 들어간 흔적도 없이. 손대중 없는 가상이 약속한 그대로, 죽음은 거두어졌고 고통만 기억에 남았다.

그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손을 — 온전한 두 손을 — 내려다보다가, 가슴께를 한 번 짚었다. 결정체에 접혀 들어가던 그 자리를. 거기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듯이.

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목덜미의 가는 상처가, 통각 다섯 단계의 약속대로 따끔하게 남아 있었다. 종이 한 장. 그만큼만, 내가 먼저 닿았다. 반대였다면, 나는 지금 저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먼저 본 자와, 먼저 닿을 뻔한 자.

이긴 것 같지가 않았다.

"……수석사서."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낮고, 건조한, 평소의 그 목소리였다. 다만 그 끝이, 아주 미세하게 — 흐려졌다가, 그가 곧 단호하게 닫았다.

"방금 그것은. 무엇입니까."

기술명을 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영원히 기억되는 형태입니다."

"……"

"제 서고에 모셔, 잊혀지지 않게 하는 것이지요. 제가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을, 엑타르 대원께 드린 것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 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형제."

"예."

"다시는, 그러지 마십시오."

존댓말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평소의 그가 의식적으로 누르던 무언가가, 처음으로 통제를 잃고 새어 나왔다.

"죽음으로서, 의무가 끝나는 겁니다. 갇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갇히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그를 보았다.

그는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라고 했다. 나도 그렇다. 우리는 같은 것을 두려워했다. 그런데 그 같은 두려움에서, 그는 *풀려나는 길*을 택했고, 나는 *붙드는 길*을 택했다.

같은 창을 들고, 정반대의 불꽃을 피우듯이.

나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를 모셔 두는 것이 예우라 믿었는데, 그에게는 그것이 가장 깊은 모독이었다.

흐음.

오래도록, 분류되지 않을 책이었다.

"……알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대답이었다. 동의는 아니었다. 다만, 들었다는 말이었다.

그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그도 알았을 것이다. 내가 그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색인했을* 뿐이라는 것을.

그것이, 우리 사이의 가장 정직한 거리였다.

입회석에서, 총대장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끼어들지 않았다. 다만 보았다. 거짓을 가려내는 눈으로, 우리 둘이 손대중 없이 부딪쳐 어디까지 가는지를.

그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햇빛도 없는 가상 안에서, 그의 눈에는 빛이 없었다. 그는 진실을 보는 데에 빛이 필요한 사람이지만, 방금 본 것에는 빛이 필요하지 않았다. 너무 분명했으니까.

"좋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 뒤에, 덧붙였다.

"두 사람을, 같은 작전에 두지 않겠다는 내 판단은 — 옳았습니다."

그것은 칭찬이 아니었다.

"엑타르 대원의 창은, 숙 대원이 본 자리에 닿을 뻔했습니다. 숙 대원의 불꽃은, 엑타르 대원을 거두었고. 둘 다 거의. 그 '거의'가, 종이 한 장이었지요."

그가 나를 보았다. 그리고 엑타르 대원을 보았다.

"실전이었다면, 그 종이 한 장 너머에서 — 한 사람은 베이고, 한 사람은 박제됐을 겁니다. 그리고 그 둘 다, 헤븐워커가 잃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가 등을 돌렸다.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을 갈라 둡니다. 적으로 만나지 않도록. ……오늘처럼."

총대장이 손을 들자, 대련 구역의 푸른빛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서가가 흐려지고, 돌바닥이 풀리고, 죽은 공기마저 거두어졌다.

「 대련 구역을 봉인합니다. 페인 업소버 해제. 무결성 — 정상 」

마지막 문장에, 증오는 섞이지 않았다. 나는 안도했다. 닫는 데에는, 늦지 않았다.

가상이 거두어지는 마지막 순간, 나는 엑타르 대원을 한 번 더 보았다.

그는 이미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사라진 의식의 성소를 향해서가 아니라, 그저 습관처럼. 작전이 끝났을 때 그가 늘 하는 것. 짧은 기도, 혹은 누군가를 위한 묵념.

누구를 위한 것인지, 나는 묻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방금, 잊혀지지 않는 것의 끔찍함을 알았고 — 그런데도, 잊혀진 누군가를 위해 다시 무릎을 꿇었다.

나는 그를 영원히 보존하려 했고, 그는 영원히 누군가를 놓아주려 했다.

우리는 끝내, 서로에게 그 말을 하지 못했다.

당신이 옳을지도 모른다고.

세상이, 하얗게 풀렸다.

그리고 종이 냄새가, 다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