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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01 / 01

이름_없는_예우

# 이름 없는 예우

밤이었다.

봉인의 탑 순찰로가 시작되는 계단참에는, 밤마다 빛으로 짠 명단이 하나 떠 있었다. 서고가 관리하는 푸른 묘지의 기록 —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이름이었다.

오가는 이들은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아는 이름 하나에 눈을 두었다가, 조용히 목례하고 지나갔다.

이름을 불러 주지 않으면 그이는 두 번 잃는 거라고, 언젠가 누가 그랬다. 한 번은 목숨을, 한 번은 기억을. 그래서 이 명단은 무덤이 아니라 목소리였다 — 아직 잊지 않았다고, 밤마다 조용히 확인해 주는.

라이라는 순찰을 잠시 멈추고 그 앞에 섰다.

"오~ 이런 게 여기 있었네."

이름이 한 줄씩 위로 흘렀다. 처음 보는 이름들. 그래도 그녀는 하나하나 눈으로 짚어 읽었다. 신참인 그녀에게는 아직 아는 이름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서 더, 한 줄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낯선 이름 하나에 잠깐 눈을 두면,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이 어떤 목소리였을지 궁금해졌다. 누구의 곁을 지켰을지, 어떤 농담에 무심코 웃었을지. 불러 주는 동안만이라도, 그 사람은 아주 조금 다시 여기 있는 것 같았다.

명단은 낮게 *웅—* 빛을 흘리며 이름을 밀어 올렸다.

그러다 한 자리에서, 그녀의 눈이 미끄러졌다.

이름과 이름 사이. 위로 흐르던 줄이 거기서 짧게 걸렸다가 다음 줄로 건너뛰었다. 라이라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방금 무언가를 지나쳤다는 감각. 그런데 무엇을 지나쳤는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

물결처럼 끝을 늘이던 말끝이, 처음으로 그냥 툭 떨어졌다.

손끝이 저릿했다. 그녀는 그 손을 반대 손으로 감쌌다. 왜 그랬는지는 그녀도 몰랐다.

곁에 섰던 다른 대원도 잠깐 멈칫하는 게 보였다. 그 사람은 이내 고개를 한 번 젓고는, 기분 탓이라는 듯 발길을 돌렸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록커킴은 결계실 안쪽에서 신성 결정체를 살피고 있었다. 손끝으로 표면을 훑는, 그가 사물을 '읽는' 손. 라이라가 들어서자 그 큰 등이 조금 돌아앉았다.

이 방의 물건들은 그의 손 아래에서 늘 무언가를 건넨다고 했다. 결정체는 낮게 눌리는 하중을, 룬은 새긴 이의 정성을, 벽에 걸린 오래된 장비는 그것을 쥐었던 손의 온기를. 록커킴에게 이 방은 한 번도 조용한 적이 없는 방이었다.

"록커킴."

"……."

"저기, 여기 분과장님은 어디—"

말이 중간에서 멈췄다. 물으려던 문장의 뒷부분이, 입에 담기도 전에 손가락 사이로 새어 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물으려 했는지 다시 붙잡으려 했지만, 그 자리엔 이미 아무것도 없었다.

결계실 벽 한쪽에, 방패 하나가 기대 세워져 있었다.

손잡이의 가죽이 오래 쥔 누군가의 손 모양대로 닳아 있었다. 검지가 닿던 자리, 엄지가 눌리던 자리. 아직도 그 손이 방금 놓고 간 것처럼 홈이 따뜻해 보였다. 라이라가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거, 누구 거야?"

록커킴이 다가왔다. 방패에 손바닥 전체를 붙였다. 결정체를 살필 때의 손끝이 아니라, 무언가를 '듣는' 손이었다.

오래 그러고 있었다.

이 방의 모든 것이 그의 손 아래 무언가를 남기는데, 이것만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쥐었던 손의 온기도, 막아 낸 무수한 타격의 무게도, 만든 이의 정성도 — 응당 배어 있어야 할 그 모든 것이, 손바닥에 닿기도 전에 미끄러져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이것을 든 적이 없다는 듯이. 그러나 손잡이의 홈은, 분명히 누군가의 손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었다.

록커킴이 손을 뗐다. 장갑 안쪽을 한 번 털었다 —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는데도.

"모른다."

낮은 저음이 짧게 떨어졌다. 그가 사물을 두고 '모른다'고 말하는 걸, 라이라는 처음 들었다.

순찰 동선은 그들이 지켜야 할 자리를 하나씩 지났다.

정비대 구석에, 양손검 한 자루가 날을 세운 채 세워져 있었다. 매일 누군가 손질한 흔적. 곁의 숫돌에는 손때가 배어 반들거렸다. 라이라는 관리 목록을 넘겨 보았다. 이 검의 주인이 적혀 있어야 할 칸이, 아예 없었다. 칸 자체가 없어서, 빠졌다고 말할 수조차 없었다.

"……음."

감탄사가 나오다 말고 사그라들었다.

탑을 오르는 순찰 라인의 선두, 늘 한 사람이 서던 자리가 비어 있었다. 록커킴이 말없이 그 앞으로 나가 섰다.

"여긴 내가 맡는다."

"원래 누가 섰던 자린데?"

록커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미룬 게 아니라, 대답할 것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침묵이었다. 그는 그냥 그 자리를 메웠다. 언제부터 자신이 그걸 메우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의 등은, 지킬 사람이 있던 자리를 지키던 버릇 그대로 그 앞에 서 있었다.

라이라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밝게 떠 있던 목소리가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다. 새로운 걸 보면 "오~" 하고 먼저 나오던 감탄도, 손끝으로 무언가를 매만지던 버릇도, 지금은 없었다. 손은 옆구리에 가만히 붙어 있었다.

무언가 잘못됐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됐는지 도무지 이름 붙일 수가 없었다. 이름을 붙이려는 순간마다, 그것이 있던 자리가 매끄럽게 지워져 있었다. 빈자리는 분명히 있는데, 그 빈자리를 낸 무언가는 이름도, 형체도, 방향도 없었다.

다시 명단 앞이었다.

라이라도 이름을 하나 불러 주기로 했다. 처음 보는 이름이라도, 오늘 밤 누군가는 불러 주는 편이 좋을 테니까. 그녀는 흐르는 빛을 따라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부를 이름이 오지 않았다.

빛의 줄 사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얇은 틈. 무언가 있어야 할 곳에 긁힌 자국과 바래 가는 빛만 남아 있었다. 하나, 둘… 세다 만다. 셀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숫자가 손끝에서 미끄러졌다. 세어지지 않는 것을, 없었던 것으로 세상은 이미 매듭지어 둔 뒤였다.

명단의 빛이 그 자리에서 흠칫 떨리더니, 무언가를 띄우려다 말고 흩어졌다.

라이라의 입이 반쯤 열린 채로 멈췄다. 부르고 싶은데 부를 것이 없었다. 잊은 게 아니었다. 잊었다면 애초에 그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조차 몰랐을 테니까. 잊은 게 아니라 — 처음부터 없던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 없음의 모양이, 이상하게도 사람의 모양이었다. 여럿의, 사람의 모양.

손등이 잠깐, 낯설게 희어졌다. 그녀는 그 손을 얼른 소매 안으로 넣었다.

아주 짧게, 어딘가에서 온기 같은 것이 스쳤다. 늘 곁에서 무언가를 권하던 기척, 조용히 앞을 막아 서던 넓은 그림자, 날붙이를 매일같이 닦던 성실한 손길 — 이름도 얼굴도 없이, 있었다는 감촉만. 분명 이 탑을 함께 걸었을 누군가들. 함께 웃고, 함께 서고, 함께 지켰을.

이름을 불러 주지 않으면 두 번 잃는다던 그 말이, 여기서는 통하지 않았다. 불러 주고 싶어도 부를 이름이 없었으니까. 잃은 것이 하나 더 있었다 — 목숨을, 기억을, 그리고 이제는 잊혔다는 사실조차.

그리고 곧 흩어졌다. 붙잡을 손잡이가 세상에 남아 있지 않았다.

라이라의 눈가가 젖었다. 왜 우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슬퍼할 대상이 이미, 슬퍼할 수 없도록 지워져 있었으니까. 눈물만이, 이름을 잃은 애도처럼 이유 없이 흘렀다.

록커킴이 한 걸음, 그녀 곁으로 붙었다. 큰 등이 반쯤 앞을 가렸다.

"뒤에 있어."

무엇으로부터 지키는지는 그도 몰랐다. 다만 지킬 것이 사라진 자리에서도, 그의 몸은 여전히 지키는 법을 기억하고 있었다.

"……괜찮아."

라이라가 짧게 말했다. 물결도 감탄도 없이, 자기 자신을 여미는 한 마디였다. 그녀는 괜찮지 않았지만, 무엇이 괜찮지 않은지 말할 수 없다는 것만은, 아주 잠깐 정확히 알았다.

라이라가 명단에서 눈을 떼자, 빛은 스스로 접혀 들어갔다.

긁힌 자국도, 바래 가던 자리도, 접히면서 매끄럽게 아물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문 적조차 없던 것처럼.

록커킴이 방패를 다시 벽에 세워 두었다. 양손검은 정비대 제자리로 돌아갔고, 숫돌은 손때가 밴 그대로 남았다. 주인 없는 물건들이, 원래 거기 있었다는 듯 얌전히 놓였다. 내일이면 누군가 또 무심코 그 검을 갈 것이다. 왜 가는지도 모른 채로. 그렇게 물건만이, 이름을 잃은 자리를 대신 지킬 것이다.

저편, 본부 쪽에서 웃음소리가 옅게 넘어왔다. 열아홉 개의 목소리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밤을 채우고 있었다. 세상은 무사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라이라는 계단을 오르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유 없이 멈칫했다.

"……가자, 라이라."

스스로에게 이름을 불러 주고, 그녀는 발을 뗐다. 다음 걸음을 딛는 순간, 방금의 위화감마저 매끄럽게 흩어졌다. 그녀는 곧 이 밤을 잊을 것이다.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로.

언젠가 이름 하나가 목록에서 조용히 빠지는 날이 온다더니. 그 밤은 아무도 모르게 이미 지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밤을 끝까지 지켜본 눈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 지금, 여기 비어 있는 자리에 잠시 눈을 멈춘, 당신을 빼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