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1 / 01
순환이 멈춘 평화
라이라가 혼자 들어온 건, 누가 먼저 등을 떠밀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직전까지 라이라는 대서고 열람석 끝에 섰다. 사람 없는 거리의 잔상이 문 안쪽에 남아 있었고, 숙은 손끝으로 접속선을 누르고 있었다.
"카일 씨는 직접 들어갈 수 없습니다."
숙의 목소리가 먼저 닿았다.
"문 안쪽에는 같은 사람이 걸립니다. 카일 씨는 이쪽에서 목소리만 붙잡아 주십시오."
흰빛은 카일의 반지 아래에서 한 번 접히듯 눌렸다. 카일이 문 쪽으로 손을 내밀었지만, 빛은 손가락을 타고 오르지 않았다. 대신 카일이 라이라 쪽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바닥을 미끄러져 왔다.
아이기스 표식이 달린 소매 끝이 차갑게 저렸다. 빛은 라이라의 발 앞에서 멈춰, 얇은 원을 그리며 한 번 돌고 그 자리에서 닫혔다. 분과장이 직접 들어갈 수 없다면, 그 명령을 듣고 움직일 사람은 라이라는 신호였다.
"저 혼자예요?"
라이라가 묻자, 숙이 짧게 대답했다.
"한 명만요. 저는 접속선을 잡겠습니다. 카일 씨는 이쪽 목소리를 놓지 마십시오. 츄니티 씨는 빠져나오는 감각만 기억해 주십시오. 다른 열람석은 닫겠습니다."
"훈련종 때는 도즈 총대장님하고 하세운 씨만 빠졌잖아요."
츄니티가 물었다.
"왜 이번에는 전부 닫아요?"
숙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문 안쪽의 흰빛은 빈 거리처럼 얇았고, 녹색 선 너머에서 버티던 훈련장의 침묵과는 결이 달랐다.
"그쪽은 산 사람이 안에 서야 움직이는 전장이었습니다. 잔영과 현재의 몸을 갈라 놓으려면, 지금 살아 있는 발자국이 필요했습니다."
숙의 손끝이 접속선을 조금 더 깊게 눌렀다.
"이쪽은 빈 거리를 읽는 쪽입니다. 산 사람 발자국이 늘면, 무엇이 사라졌는지가 묻힙니다. 그래서 현장은 한 명입니다."
"기록 담당인데 적으면 안 된다니, 진짜 곤란하네요."
츄니티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수첩을 넘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라이라."
카일이 말했다.
"들리면 바로 대답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서고의 종이 냄새가 끊겼다.
툭.
목 뒤에서 얇은 실이 툭 끊기는 소리가 났다. 라이라가 반사적으로 돌아보려 했을 때, 이미 상점 문고리가 눈앞에 있었다.
달칵.
문고리는 손끝 아래에서 한 번만 얌전하게 울리고 멈췄다.
소리가 너무 잘 들렸다. 맞은편 가게 처마에서도, 닫힌 창 안쪽에서도, 돌아오는 소리가 없었다.
라이라는 처음에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닫힌 문은 닫힌 문일 뿐이고, 가지런히 접힌 천막은 장사를 마친 뒤 주인이 남긴 습관일 수도 있었다. 길가의 의자가 반듯하게 들어가 있고, 창가의 화분이 줄 맞춰 놓인 것도 전부 사람 손이 한 번씩 지나간 흔적이었다.
그 손들이 어디에도 없었다.
돌길은 깨끗했다. 너무 깨끗했다. 전쟁터라면 있어야 할 검은 자국도, 대피할 때 흘린 짐도, 몬스터가 남긴 발자국도 없었다. 빨래줄에는 마른 천이 널려 있었고, 천 끝은 바람 한 점 없는 공기 속에서 가만히 멈춰 있었다.
라이라는 발을 한 걸음 내딛었다. 발바닥 아래에서 작은 모래가 부서지는 소리가 먼저 올라왔다. 그제야 입가까지 올라온 첫 인사를 삼켰다.
누구 있어, 라고 말하려던 입술이 먼저 닫혔다. 목소리가 너무 멀리 가 버릴까 봐, 목 안쪽이 조여 왔다.
시야 가장자리에서 아주 작은 글자가 켜졌다가 꺼졌다.
「 응답자 없음 」
마지막까지 남은 건 대서고 열람석 너머 카일의 손끝이었다. 그 손이 시야 가장자리에서 멀어지자, 발밑의 도서관 바닥은 낯선 돌길로 바뀌어 있었다.
카일의 목소리는 몸보다 늦게 따라왔다.
◈ 통신라이라. 들려?
"들려요."
라이라는 대답하고 나서야 제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는 걸 알았다. 평소라면 먼저 웃으며 덧붙였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괜찮다고, 생각보다 멀쩡하다고, 이 정도면 길 찾기는 쉬워 보인다고.
그런 말은 이 거리에서 너무 가벼웠다.
◈ 통신다친 데는.
"없어요. 거리예요. 시장 같고, 상점도 있고…… 사람은 없어요."
통신 너머에서 숨이 한 번 짧게 끊겼다. 라이라는 그 짧은 공백을 듣고, 카일이 지금 농담을 고르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 통신살아 있는 사람부터 찾아보자.
"네."
라이라는 몸을 낮춰 가장 가까운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진열대에는 과일이 남아 있었다. 껍질은 멀쩡했고, 빛도 탱탱했다.
푹.
하나를 손끝으로 건드리는 순간, 껍질 아래가 한 번에 꺼졌다. 마른 흙이 손톱 밑으로 바스러졌다.
냄새가 늦게 올라왔다.
썩은 냄새가 아니었다. 오래 닫힌 방에서 종이와 먼지가 같이 식어 버렸을 때 나는 냄새. 생명이 썩은 게 아니라, 살아 있다는 사실만 빠져나간 뒤 남은 껍데기 냄새였다.
◈ 통신손대지 마십시오.
숙의 목소리였다. 평소처럼 길게 돌려 말하지 않았다.
◈ 통신겉모습만 남았습니다. 입에 넣으면 안 됩니다.
"먹을 생각은 안 했어요."
라이라는 그렇게 말하고 손을 거두었다. 그런데 스스로도 어색했다. 먹을래, 라고 먼저 묻던 사람이 통신 너머에 있는데, 이 거리에는 줄 것도 받을 것도 없었다.
◈ 통신물은요?
츄니티의 목소리가 낮게 끼어들었다. 수첩을 넘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손톱이 종이 모서리를 누르다 멈춘 듯한 작은 마찰음만 통신 사이에 스쳤다.
"물그릇이 있어요. 성당 앞."
라이라는 거리 끝으로 걸었다. 성당이라고 부르기에는 작고, 마을 사람들이 기도하러 드나들 법한 낮은 예배당이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안쪽 의자들은 한 줄도 밀리지 않았고, 제단 위의 천도 접힌 자국 그대로였다.
제단 앞 물그릇에는 물이 차 있었다.
표면은 흔들리지 않았다. 라이라가 가까이 다가가도, 숨이 닿아도, 물은 거울처럼 굳어 있었다. 소매 끝에 묻은 먼지 한 점이 수면 위로 떨어졌다.
톡.
파문은 생기지 않았다.
그 아래로 아주 옅은 회색이 번져 있었다. 잿빛도 아니고, 곰팡이도 아니었다. 물속에 그림자만 남아 굳은 색.
라이라는 그 색을 보자마자 손을 뒤로 뺐다.
◈ 통신과일 속이 말라 있던 색하고 같나요?
"비슷해요. 과일, 물, 제단 천 가장자리까지요."
◈ 통신번진 모양이 아닙니다.
숙이 말했다.
◈ 통신같은 회색이 여러 곳에 한꺼번에 내려앉았습니다.
"저주예요?"
라이라는 묻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숙이 대답하기 전, 굳은 물 표면 위로 예배당 뒤편 문틈이 비쳤다.
끼익.
예배당 뒤편 문이, 이미 열려 있던 폭보다 손가락 하나만큼 더 벌어졌다.
"그렇게 불렀어. 처음에는."
대답은 통신 너머가 아니라 뒤편에서 왔다.
낮은 목소리였다.
라이라는 몸을 돌렸다. 먼저 제단을 등지고, 문과 자기 사이의 거리를 쟀다. 무기를 뽑는 동작보다 먼저, 눈이 사람의 얼굴을 찾았다. 예배당 뒤편, 반쯤 열린 문가에 카일이 서 있었다.
통신 너머의 카일이 아니었다.
제복은 낡았다. 찢어진 곳보다 다시 기운 자리가 많았다. 소매 끝은 오래 접었다 펴서 희게 닳았고, 어깨의 아이기스 표식은 색이 빠졌지만 떨어지지는 않았다. 반지 낀 손은 문틀을 짚었다. 흰빛은 없었다.
라이라는 한순간 말을 잃었다.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통신 너머의 카일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웃을 자리가 얼굴에 남아 있는데, 너무 오래 쓰지 않아 굳어 버린 사람. 농담을 꺼내는 법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 농담을 받아 줄 상대를 전부 잃은 사람.
◈ 통신라이라. 물러서.
통신 너머의 카일이 낮게 말했다.
눈앞의 카일은 라이라가 움직이기 전에 먼저 손을 들어 보였다. 무기는 없었다. 공격하려는 자세도 아니었다. 시선은 라이라가 서 있는 자리, 문, 제단, 통신 소리에 굳어 있는 어깨까지 차례로 훑었다.

"다친 데는."
첫 질문부터 몸이었다.
라이라는 대답이 늦었다.
"없어요."
"통신은 살아 있고?"
"네."
"뒤에 더 들어온 사람은?"
"현장에는 저 혼자예요. 다른 분들은 대서고 쪽에서 듣고 있어요."
눈앞의 카일은 그제야 아주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라고 부르기에는 작고, 살아 있는 사람을 다시 세는 습관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오래 남는 동작이었다.
카일은 문 뒤와 제단 아래를 먼저 확인했다. 누가 숨어 있는지 찾는 손길이 아니라, 누가 쓰러져 있지 않은지 세는 손길이었다. 마지막으로 라이라의 빈손과 발목을 보더니, 그제야 예배당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먹을 건 없어."
예배당 안쪽 의자 하나를 발끝으로 조금 밀어냈다.

"그래도 앉아. 서서 들으면 허리 아파."
그 말이 너무 카일다워서, 라이라는 오히려 더 쉽게 앉지 못했다.
통신 너머가 조용해졌다.
눈앞의 카일은 그 침묵을 못 들은 척했다. 아니, 들었다고 해도 묻지 않았다. 같은 사람끼리 닿으면 무너지는 규칙을 이미 아는 사람처럼, 통신을 향해 직접 말을 걸지도 않았다.
"라이라."
처음 부른 이름이었다. 직급도, 분과도 붙이지 않았다.
"뭘 보러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마주치는 건 대체로 늦은 것들이야. 늦게 알아챈 것. 늦게 멈춘 것. 늦게 남은 사람."
"카일 씨는……"
라이라는 거기서 멈췄다.
구해 달라고 해야 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괜찮아 보이지도 않았다. 물어야 할 말이 너무 많아 첫 질문이 사라졌다.
눈앞의 카일은 라이라가 삼킨 말을 알아차리고, 예배당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가 남았는지 묻기 전에, 누가 오지 않았는지부터 봐."
카일은 예배당 뒤편의 작은 기록실로 걸어 들어갔다.
라이라는 그 뒤를 따랐다.
기록실에는 먼지가 거의 없었다. 누군가 마지막 날까지 계속 닦았다는 말이었다. 책상 위에는 두꺼운 명부와 얇은 보고서들이 쌓여 있었다.
벽 한쪽에는 이름표가 줄줄이 걸려 있었다. 대부분 뒤집혀 있었고, 앞면으로 남은 표식은 세 개뿐이었다. 가능성의 카일은 그쪽을 보지 않는 법을 오래 연습한 사람처럼, 시선을 책상 위에만 두고 있었다.
라이라는 첫 장을 넘기다가 손끝을 멈췄다.
「 충돌 없음 」
사각.
종이 모서리가 손톱 아래를 긁고 넘어갔다. 그 아래에도 같은 말이 있었다.
「 충돌 없음 」
다음 장에도, 그다음 장에도.
「 몬스터 출몰 없음 」
「 경계선 이상 없음 」
「 분쟁 보고 없음 」
또 한 장.
「 구조 요청 없음 」
「 초소 교대 정상 」
「 피해 없음 」
좋은 기록이어야 했다.
그런데 너무 많았다. 하루, 이틀, 한 달, 계절이 넘어가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기록이 빽빽하게 이어졌다. 안전하다는 말이 반복될수록 종이는 점점 차가워졌다.
츄니티의 숨이 통신 너머에서 낮게 새어 나왔다.
◈ 통신기사로 쓰면 좋은 소식이어야 하는데요.
아주 작은 침묵 뒤, 츄니티가 덧붙였다.
◈ 통신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죠.
"처음엔 다들 좋아했어."
눈앞의 카일이 말했다.
이어 세 장을 더 넘겼다. 기록마다 사건명 칸은 비어 있었고, 그 옆의 구조 담당 칸만 눌려 있었다. 누군가 일이 벌어지기 전에 끝냈다는 흔적만, 너무 가지런했다.
보고서 오른쪽 아래에는 작은 인장 자리 둘이 붙어 있었다. 앞장에는 눌린 자국이라도 있었지만, 뒤로 갈수록 종이는 매끈했다. 재앙이 시작됐다는 칸도, 누군가를 불러야 한다는 칸도, 찍힐 차례를 잃고 비었다.
"마왕이라고 부르던 큰 재앙들이 줄었어. 그걸 막으려고 세우던 용사도 점점 필요 없어졌고. 주인공 밀레시안이 너무 잘 싸웠고, 헤븐워커도 밑에서 너무 많이 막았거든."
빈 사건명 칸 하나를 손끝으로 눌렀다.
"마을 하나가 불타기 전에 껐고, 도시 하나가 포위되기 전에 길을 열었고, 전쟁 하나가 이름 붙기 전에 끝냈어."
명부 한가운데를 손끝으로 눌렀다.
"좋은 일이었어."
그 문장은 짧았고, 단단했다.
"그건 아직도 틀리지 않았어."
라이라는 보고서 위의 반복된 글자를 보았다. 피해 없음. 구조 요청 없음. 분쟁 없음.
분쟁이 없다는 문장은, 사람 없는 거리의 정적과 같은 색이었다.

"그런데 신들은 아니었나 봐."
카일이 다음 장을 넘겼다.
이번에는 명부가 아니었다. 종이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카일의 손끝에 회색 가루가 묻었고, 가장자리는 닿는 자리마다 조금씩 부스러졌다. 가운데에는 문장 몇 줄이 남았다. 누가 읽으라고 남긴 글이라기보다, 읽히지 않으려고 버틴 흔적처럼 군데군데 끊겨 있었다.
파직.
탄 가장자리가 아주 조금 부스러졌다.
카일은 묻은 재를 털지 않았다.
「 순환 지연 」
「 용사 호출 조건 미충족 」
「 마왕 발생 조건 침묵 」
세 줄이 모두 드러나자, 라이라는 저도 모르게 반 걸음 물러섰다. 허벅지가 책상 모서리에 닿았다.
단어들이 전부 이해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단어들이 향하는 곳은 너무 분명했다.
"전쟁이 안 나서요?"
"응."
카일은 웃지 않았다.
"전쟁이 안 나서."
통신 너머에서 현재의 카일이 아주 낮게 숨을 들이켰다. 눈앞의 카일은 그 소리가 닿은 사람처럼 잠깐 눈꺼풀을 내렸지만, 이번에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카일은 계시문 아래쪽에 나란히 비어 있는 두 인장을 가리켰다. 하나는 마왕 발생, 하나는 용사 호출. 둘 다 찍히지 않은 자리만 종이를 눌러 놓고 있었다.
"신들에게는 마왕과 용사의 순환이 재앙이면서도, 매번 같은 자리에 찍히는 인장이었어. 마왕이 일어나면 용사의 인장이 찍히고, 용사가 세계를 구하면 다음 균형을 계산할 수 있었으니까."
손끝이 빈 인장 사이에서 멈췄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오래 그 자리를 비워 뒀어. 사람을 너무 많이 살렸고, 싸움이 이름을 얻기 전에 너무 많이 끝냈어."
"그래서…… 벌을 줬어요?"
라이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신들은 벌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거야."
카일은 책상 아래에서 작은 금속 상자를 꺼냈다. 뚜껑은 오래전에 휘었고, 안쪽에는 제단의 물과 같은 회색이 말라붙어 있었다. 회색 결정 조각 몇 개가 밀랍 봉인에 달라붙었는데, 봉인 문양은 절반쯤 타서 원래 모양을 잃었다.
끼긱.
상자 안쪽의 금속이 늦게 비명을 냈다.
"기록에는 조정이라고 남았어. 순환이 멈추기 전에, 세계가 다음 용사를 부를 수 있게 큰 위기를 다시 열어야 한다고. 파르홀론을 삼켰던 재앙과 같은 계열의 저주를 에린 전체에 흘려보내면 된다고."
파르홀론.
라이라는 그 이름을 알았다. 오래된 멸망의 이름. 신들의 손이 한 번 닿았고, 너무 많은 사람이 그 이름 아래서 사라졌던 종족.
그 이름이 이 작은 예배당의 기록실에서 다시 나오자, 라이라의 등줄기가 차갑게 식었다.
◈ 통신파르홀론식 저주를 재사용했다는 뜻입니까.
숙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완전히 같은지는 몰라. 나는 신들의 회의장에 있었던 게 아니니까."
눈앞의 카일은 바로 선을 그었다.
"내가 가진 건 저주가 지나간 자리에서 본 것, 남은 계시문, 각 초소에서 죽기 직전까지 올린 보고, 이 빈 기록뿐이야."
카일은 마지막 장을 펼쳤다.
종이는 거의 비어 있었다.
빈 종이처럼 보였지만, 정중앙에 한 줄만 남아 있었다.
「 주인공 밀레시안 호출 기록 없음 」
라이라는 그 문장을 한참 동안 보았다.
늦은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오지 않았다.
"신들은 그 사람이 다시 올 거라고 믿었어."
카일이 말했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칼리번이 다시 세계를 집어삼키려 했을 때도, 신들의 검이 신들의 손을 벗어났을 때도, 세계가 자기 무게를 못 버티고 기울 때도. 그 사람은 어떻게든 와서, 말도 안 되는 일을 인간 쪽으로 끌어내렸어."
라이라는 입술을 꾹 눌렀다.
"그런데 그 가능성의 주인공 밀레시안은, 그때 없었어."
카일은 빈 종이 위에 손을 올리지 않았다. 닿으면 그 공백이 손끝으로 옮겨 붙을까 봐, 아주 가까운 곳에서 멈췄다.
"부활도 없었고, 귀환도 없었고, 전장에 뛰어드는 일도 없었어. 저주는 풀렸고, 막을 사람은 오지 않았어. 순환을 되돌리겠다고 푼 재앙이, 순환을 되돌릴 손 없이 퍼진 거야."
라이라는 갑자기 밖의 거리가 생각났다. 반듯하게 닫힌 문. 마른 과일. 흔들리지 않는 물.
잘 정리된 의자. 아무도 도망치지 못한 게 아니라, 도망칠 일이라고 알아채기도 전에 세계가 조용히 속부터 비어 버린 풍경.
"그럼 우리가 잘못한 거야?"
말이 먼저 나왔다.
질문이 입 밖으로 나간 뒤에야, 라이라는 명부 가장자리를 너무 세게 누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손톱 밑이 하얗게 질렸다. 눈앞의 헤븐워커가 잘못했느냐고 묻고 있었다. 전쟁을 막고, 사람을 살리고, 재앙에 이름이 붙기 전에 꺼 버린 일이 잘못이었느냐고.
어쩌면, 통신 너머에서 듣고 있는 사람들도 언젠가 같은 죄명을 받을 수 있느냐고.
"사람들을 살려서?"
눈앞의 카일이 처음으로 라이라를 똑바로 보았다.
그 얼굴에는 지친 사람의 빛이 있었다. 너무 오래 버틴 사람의 눈. 그래도 지금 이 질문만큼은 늦게 답하지 않겠다는, 분과장의 눈.
"아니."
짧은 대답이었다.
"그렇게 계산한 쪽이 잘못한 거야."
라이라는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우리는 사람을 살렸어. 그건 아직도 틀리지 않았어."
라이라의 손끝에서 명부 가장자리가 조금 펴졌다. 방금까지 기록으로만 굳어 가던 대답이, 처음으로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쉬운 말이었다면 이 세계가 이렇게 비어 있을 리 없었다.
◈ 통신그 보고가 현재 대서고 문서에 닿았습니다.
숙이 말했다.
목소리 사이로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대서고의 종이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라이라의 코끝에 닿았다. 기록실 책상 위의 보고서 아래로, 보이지 않는 종이 한 장이 더 겹쳐졌다.
◈ 통신라이라 씨. 빈 문서 위에 글자가 생기고 있어요.
츄니티의 말끝이 흔들렸다.
◈ 통신이건…… 헤드라인으로 만들면 안 되는 쪽이네요.
라이라는 웃지 못했다.
글자는 닿았지만, 발밑의 돌길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 책상 위 보고서의 아래쪽, 아직 비어 있는 줄 하나가 책상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카일은 책상 위 보고서를 닫지 않았다. 대신 그 옆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던 의자를 바로 놓았다. 사람이 앉아 들을 수 있게.
"그쪽 대서고에 닿았어?"
"네."
"그럼 됐어."
"안 됐어요."
라이라는 바로 말했다.
카일의 손이 의자 등받이 위에서 멈췄다.
"카일 씨는요."
통신 너머에서 카일의 숨이 멎었다.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이 한 문장 사이에 놓였고, 라이라는 그 사이에서 눈앞의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눈앞의 카일은 조금 늦게 웃었다.
웃음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주 얇았고, 농담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계속 남는 게 아니야."
"그럼요?"
"이제 들은 사람이 생긴 거지."
라이라는 그 말을 곧장 받아들이지 못했다. 보고가 닿았다는 사실로 자기 자리를 정리하는 말. 구해 달라는 부탁도 아니고, 자신을 놓고 가라는 말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카일은 라이라 쪽으로 한 걸음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빈 기록 한 장을 손끝으로 살짝 밀었다. 종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래쪽 귀퉁이만 책상에 들러붙어 단단히 버텼다.
"우리가 잘못했는지 묻지 마."
"누가 평화를 벌했는지 물어."
통신 너머에서 숙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 통신기록이 닿았습니다. 지금 돌아오십시오.
◈ 통신라이라 씨의 발자국이 바깥쪽으로 돌아옵니다. 선이 끊기기 전에 나오십시오.
스륵.
그 순간, 움직이지 않던 빈 기록의 아래쪽 귀퉁이에서 흰 선이 풀려 나왔다. 선은 책상 다리를 지나 기록실 바닥까지 내려와 라이라의 발끝을 찾았다.
빛이라기보다 종이의 결이 뒤집히는 것에 가까웠다. 라이라의 발끝에서 시작해 문턱으로, 문턱에서 거리로, 거리에서 보이지 않는 대서고 열람석 쪽으로 이어지는 얇은 선. 손에 쥔 물건은 없는데, 손끝에 종이 냄새가 묻어났다.

◈ 통신라이라.
현재의 카일이 말했다.
평소보다 낮고, 짧았다.
◈ 통신돌아와.
라이라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카일은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자, 돌아가자. 그 말은 통신 너머에 남겨 둔 말이었다. 가능성의 카일은 그 말을 빼앗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 통신자, 돌아가자.
라이라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정말 이걸로 돼요?"
카일은 대답 대신 기록실 바깥의 빈 거리를 보았다. 가지런히 닫힌 문들, 마른 과일, 물이 흔들리지 않는 작은 예배당.
"라이라."
"네."
"사람을 살린 일을, 죄처럼 들고 가지 마."
흰 선이 발밑에서 밝아졌다.
책상 위의 빈 기록이 먼저 흐려졌다. 그다음 카일의 낡은 소매, 문틀을 짚은 손, 물이 굳어 있던 제단이 차례로 종이 냄새 속으로 밀려났다.
라이라는 눈을 감지 않았다. 가능성의 카일이 마지막까지 빈 거리를 확인하는 모습을 보았다. 누가 남았는지, 누가 안 왔는지, 그래도 누가 들었는지 세는 사람처럼.
다음 순간, 돌길의 냄새가 종이 냄새로 바뀌었다.
대서고 열람석의 등받이는 생각보다 딱딱했다.
라이라는 숨을 들이켰다가, 그 숨이 도서관 안의 먼지와 섞이는 걸 느꼈다. 종이 냄새. 오래 닦인 나무 냄새. 숙의 손끝이 책 표지를 누르는 작은 소리.
돌아왔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빈 문서였던 종이 위에는 검게 눌린 글자가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한 줄뿐이었다.
「 주인공 밀레시안 호출 기록 없음 」
스르륵.
그 아래로, 가능성의 카일이 남긴 마지막 보고 일부가 천천히 번졌다. 글자가 새로 쓰이는 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눌려 있던 자국이 이제야 종이 위로 올라왔다.
숙은 그 문서를 바로 집어 들지 않았다.
한 호흡 뒤, 숙은 제한 열람 표지를 가져와 문서 위에 덮었다. 푸른 끈이 문서 가장자리를 감았다.
찰칵.
작은 봉인석이 가볍게 맞물렸다.
「 제한 열람 전환 」
숙은 그 위에 손을 얹고 짧게 말했다.
"공개 기록으로 둘 수 없습니다."
츄니티는 수첩을 꺼내려다 멈췄다.
손끝이 수첩 모서리에 닿았다가, 그대로 떨어졌다. 한참 동안 빈 손을 내려다보다가 책 표지 위에 손끝만 가볍게 얹었다.
"이건…… 헤드라인으로 만들면 안 되는 쪽이네요."
누구도 그 말에 농담으로 답하지 않았다.
카일은 반지를 낀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 반지 아래 흰빛은 꺼져 있었다. 그런데 손가락은 아직 그 빛을 쥔 자세로 굳어 있었다.
라이라는 그 손을 보다가, 가능성의 카일이 마지막까지 통신 너머의 카일에게 직접 말하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같은 사람이어서 말하지 않은 것인지.
말하면 무너질 걸 알아서 말하지 않은 것인지.
둘 다일지도 몰랐다.
"그쪽의 내가."
카일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했어?"
라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잘못했는지 묻지 말라고요."
목이 잠겼다. 라이라는 잠깐 숨을 골랐다.
"누가 평화를 벌했는지 물으라고 했어요."
대서고의 마력등이 조용히 흔들렸다. 바람도 없는데 빛이 아주 얇게 떨렸다. 숙은 표지 위에서 손을 떼지 않았고, 츄니티는 빈 손으로 책 가장자리를 누르고 있었다.

카일은 반지를 낀 손을 천천히 접었다.
먹을래, 라고 말할 자리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 말이 카일의 입가까지 올라왔다가 멈춘 걸 라이라는 보았다. 가능성의 카일이 먹을 것이 없다고 말했던 예배당이, 대서고 식당 쪽 따뜻한 불빛과 겹쳐졌다.
카일은 끝내 다른 말을 골랐다.
"그래."
짧은 대답이었다.
"그건, 물어야지."
라이라는 제한 열람 표지 아래 숨은 글자를 보았다.
대서고는 원래의 냄새로 돌아왔지만, 종이 위의 한 줄은 가능성의 거리보다 더 오래 식지 않았다.
저쪽 사람들이 돌아가는 걸 보았다.
흰 선은 마지막으로 내 신발 앞에서 가늘어졌다.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웠고, 이미 늦을 만큼 멀었다.
빛은 생각보다 조용히 닫혔다. 문이 쾅 닫히지도 않았고, 종이 불타지도 않았고, 누구 하나 뒤돌아 뛰어나오지도 않았다. 라이라의 눈동자에 끝까지 남아 있던 질문만이 얇은 흰 선을 따라 멀어졌다.
저쪽의 내 목소리는 마지막에 말했다.
자, 돌아가자.
나는 따라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안 되는 말이어서가 아니었다. 그 말은 아직 저쪽에서 쓸 수 있는 말이었다. 누군가가 말하면, 누군가가 돌아갈 수 있는 세계. 대서고의 등받이가 있고, 종이 냄새가 있고, 수첩을 닫을지 말지 망설이는 동료가 있고, 식당 쪽 불빛을 보고도 잠깐 멈춰 설 시간이 남아 있는 세계.
저쪽에는 아직 다음이 있었다.
나는 그게 부러웠다.
부럽다는 말은 생각보다 더럽게 목에 걸렸다. 라이라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 아이가 들고 가야 할 질문은 충분히 무거웠으니까. 지금 와서 내 질투까지 얹을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빛이 닫히자, 숨겨 둔 것들이 거리로 돌아왔다.
비어 있는 가게. 속이 흙이 된 과일. 닦아 둔 의자. 아무도 마시지 않은 물.
점호를 부를 때마다 대답이 하나씩 줄던 아침들. 먹을래, 하고 말하고 싶어도 손에 줄 것이 없던 저녁들.
나는 예배당 의자에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습관처럼 누군가 앉을 자리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이제 앉을 사람이 없었다. 손끝이 의자 등받이에 닿기 전 허공에서 굳었다.

보고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때 책상 위의 빈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바람은 없었다.
「 호출 기록 하단: 공란 아님 」
저쪽으로 넘어간 종이에는 없던 자리였다. 빛이 닫힌 뒤에야, 그 아래쪽이 아주 조금 검어졌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주인공 밀레시안 호출 기록 없음. 그 한 줄 아래에, 아직 읽지 못한 검은 자국이 아주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글자인지, 균열인지, 저주가 마른 자리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나는 오래 보았다.
저쪽 사람들이 돌아간 뒤에야, 이 세계는 처음으로 내게 다음을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