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3 / 03
수첩에 적힌 이름
# 03. 수첩에 적힌 이름
종이 울리기 전의 새벽이, 나는 가장 조심스럽다.
아직 아무 소리도 세어 두지 않은 시간. 세상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그 틈에, 나는 종종 무언가를 잃어버린다.
오늘 새벽에도 그랬다.
눈을 떴는데, 어젯밤 무슨 꿈을 꾸었는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히 꾸었는데. 따뜻한 무언가였는데. 손을 뻗어 봐도, 그 자리에는 매끈한 공백만 남아 있었다.
*서늘한 것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나는 반사적으로 수첩을 펼쳤다.
이럴 때는 적어 둔 것을 처음부터 되짚는다. 잃어버린 나를, 남겨 둔 기록으로 다시 세운다. 그게 내 방식이었다.
수첩을 처음부터 넘겼다. 닳은 종이가 손끝에서 *사락사락* 넘어갔다.
*— 창가 세 번째 화분, 잎이 하나 더 남.* *— 먼지 씨, 별 모양 상자를 세 번째 서가 아래로 굴려 둠.* *— 유라 씨, 비 오는 밤에는 말이 길어짐.* *— 오늘, 내 잔을 누군가 데워 둠. 범인 미상.*
빼곡했다. 화분의 잎, 동료의 습관, 고양이의 장난, 데워진 찻잔.
그런데.
아무리 넘겨도, *나*는 없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꿈을 꾸었는지, 오늘 어떤 마음으로 눈을 떴는지 — 그런 문장은 한 줄도 없었다. 나는 세상을 빠짐없이 적어 두면서, 정작 나 자신은 늘 빈칸으로 남겨 두었다.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어느 날 통째로 지워진다면. 화분처럼, 찻잔처럼, 나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마저 새어 나가 버린다면 — 그때 나를 다시 세워 줄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
한참을, 그 빈칸을 들여다보았다.
아침 종이 울리고, 대서고로 건너갔다.
가장 먼저 마주친 건 츄니티 씨였다. 늘 그렇듯 수첩을 펼쳐 든 채, 먼지에게 아침 멸치를 나눠 주고 있었다.
"셰윌라 씨. 안색이 별로네요. …라고 수첩에 적어도 될까요?"
"…그건, 대외비로 해 주세요."
"오, 그거 좋네요."
츄니티 씨는 웃으며 펜을 놀리다가, 커피를 다시 따르려 잠깐 자리를 비웠다.
그 틈에 먼지가 책상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앞발이 펼쳐진 수첩 모서리를 툭 건드리자, 페이지가 스르르 내 쪽으로 넘어왔다.
*사락.*
"잠깐, 잠깐만요, 그건 —"
돌아온 츄니티 씨가 황급히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 페이지를 보고 만 뒤였다.
그 장의 맨 위에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셰윌라 —*
그 아래로, 촘촘한 글씨가 이어졌다.
*좋아하는 차: 별로 없음. 남 것만 맞춰 우림.* *버릇: 나비를 세 마리 넘게 풀면 꼭 두 마리를 잃음.* *간식은 늘 남 주려고 준비함. 정작 본인은 안 먹음.* *밤을 새우다 손이 멈추는 순간, 꼭 창밖의 별을 봄.* *본인에 관한 칸은, 늘 비워 둠.*
나는 그 마지막 줄에서, 오래 멈췄다.
"…이걸, 언제부터."
"셰윌라 씨가 이 분과에 온 첫날부터요."
츄니티 씨는 잠깐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포기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본인이 안 적으시길래, 제가 적었어요. 저는 기록하는 사람이니까요. …여기, 빈칸은 셰윌라 씨가 직접 채우시라고 남겨 뒀고요."
나는 그 빈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고맙다는 말이 목에 걸려, 얼른 나오지 않았다.
먼지가 그 사이 내 발치로 다가와, 정강이에 머리를 문질렀다. 마치 자기 이름도 그 수첩 어딘가에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먼지 씨 항목도 있나요?"
"두 쪽이요. 이 분과에서 제일 길어요."
츄니티 씨가 태연하게 답했다. 나는 그만, 조금 웃고 말았다.
노아 씨는 서가 그늘에 있었다. 늘 그렇듯, 없는 것 같다가 거기 있었다.
"어제 그 젖은 자료 말인데요."
내가 말을 꺼내자, 노아 씨가 안경을 밀어 올렸다.
"셰윌라 씨의 수첩 말씀이십니까. 그건 잘 말랐습니다. 제가 확인했습니다."
"제 수첩을요?"
"각인되어 있습니다. 셰윌라 씨가 어느 줄을 가장 걱정하며 닦았는지도."
노아 씨는 담담하게 말했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좀처럼 '기억'이라 부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의 방식으로, 그는 지워지는 것들을 붙잡고 있었다.
"지워졌기 때문에,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셰윌라 씨가 늘 하시는 일이지요. …저도 같은 일을 합니다. 그러니 셰윌라 씨가 어느 날 흐려지신다 해도, 여기 한 사람은, 셰윌라 씨가 있었다는 걸 각인해 두고 있을 겁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새벽의 그 서늘한 두려움이, 조금씩 온기로 덮여 갔다.
대서고를 가로지르는 동안, 먼지가 내 뒤를 종종 따라왔다. 아침 멸치를 다 먹고 심심해진 얼굴로, 서가 모퉁이마다 앞발로 바닥을 툭툭 짚으며 제 나름의 순찰을 돌았다. 가끔은 나보다 앞서 걸으며, 길을 안내하는 듯한 시늉까지 했다.
카운터 뒤편에서 숙 님이 나를 불렀다.
책장 정리를 하던 손을, 이번에는 멈춘 채였다. 이 사람이 손을 멈추는 건, 정말로 중요한 것을 건넬 때뿐이다.
"흐음. 셰윌라 대원. 마침 잘 오셨습니다."
숙 님이 카운터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내 연구 노트였다.
밤새 흩어지고, 젖고, 다시 맞춰 둔 그 자료들. 그런데 어느새 가지런히 묶이고, 겉장까지 덧대어져 있었다. 밤새 누군가의 손이 오래 머문 흔적이었다.
"셰윌라 대원의 기록이라면, 대서고에 정식으로 자리를 하나 내어 두었습니다. 세 번째 서가, 눈높이 칸으로요."
"제 노트를요? 이건 아직, 완성된 것도 아닌데요."
"완성이야 천천히 하시면 됩니다. 책은 도망가지 않으니까요."
숙 님이 노트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겉장은 서늘했고, 생각보다 묵직했다. 그는 시선을 카운터 어딘가에 둔 채 말을 이었다.
"다만 이곳의 것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습니다. 오래 두고 볼 수 있는 형태로, 모셔 두었으니까요. 책이란,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워도 제 자리를 지키는 법이라서요. 어차피, 제 동선 안이니까요."
에두른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 에두름을 안다. — *네가 지워질까 두려워하는 걸, 나는 안다. 그러니 여기 남겨 두었다.*
유라 씨가 다가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작은 돌 하나였다. 손바닥만 한, 모서리가 별처럼 몇 갈래로 도드라진 돌.
"지난 순례 때, 오솔길에서 주운 거예요."
유라 씨는 짧게 말했다. 오솔길 이야기를 할 때만 나오는, 조금 풀린 말투로.
"별 같아서. …셰윌라 씨, 별 좋아하시잖아요."
"…제가 별을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밤에, 창밖을 보시니까요. 손이 멈출 때마다."
유라 씨는 그러고는 잠깐 뜸을 들이다, 아주 작게 덧붙였다.
"…저번 비 오던 밤, 그 잔도 제가 데웠어요. 식으면, 맛없으니까요."
*범인 미상*이라 적어 두었던 그 칸의 답이, 이렇게 돌아왔다.
나는 그 돌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오돌토돌한 표면에 아직 바깥의 찬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이상하게 따뜻했다. 손바닥 안에 든 작은 별 하나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정원으로 나갔다.
생명의 분수 곁에 앉아, 오랜만에 오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의 정원은 낮과 다른 얼굴을 한다. 빛을 머금은 식물들이 발밑에서 자잘하게 반짝이고, 분수는 나직이 물소리를 흘렸다.
주머니 속의 그 돌이, 손바닥 안에서 가만히 무게를 더했다.
나는 늘 저 별을 다시 하늘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지워진 채 사라진 것들을, 하나라도 제자리에 되돌리고 싶어서.
그런데 오늘에서야 알았다. 관측하는 건 늘 내 쪽이라고만 생각했는데 — 나도 누군가에게, 오래 관측되고 있었다.
별을 되돌리는 일은 아직 멀었다. 그래도 오늘, 나는 어딘가에 분명히 적힌 사람이 되었다.
숙소로 돌아와, 나는 수첩을 펼쳤다.
늘 비워 두던 그 칸에, 오늘은 처음으로 한 줄을 적었다.
그 돌을 책상 한쪽에 올려 두고, 펜을 들었다.
*톡.*
펜 끝에서 잉크가 한 방울 번졌다.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했다.
*— 나, 셰윌라. 오늘 하루를, 기억하고 싶었음.*
짧은 한 줄이었다. 그러나 그 한 줄이, 수첩에서 가장 무거웠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도, 나는 또 누군가의 하루를 적겠지. 이제는, 내 것도 한 줄쯤 곁들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