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2 / 03
비 오는 날의 다섯 잔
# 02. 비 오는 날의 다섯 잔
비 오는 밤의 대서고를 나는 좋아한다.
유리 천장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면, 이 조용한 곳에도 소리가 생긴다.
*투둑, 투두둑.*
수천 권의 책이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밤샘하는 날이면 늘 이곳으로 건너온다.
비 오는 밤이면 대서고의 공기가 조금 달라진다. 마른 종이 냄새에 젖은 흙 냄새가 옅게 섞여 들고, 유리 천장 너머의 빛이 물기를 머금어 한결 부드러워진다.
오늘은 밤샘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넷이나 더 있었다.
그런 날은, 차를 다섯 잔 우린다.
다섯 잔을 우리는 밤이 나는 좋다. 잔의 개수만큼 곁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고, 그 개수를 세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잊지 않아도 되니까.
잔들이 얹힌 쟁반은 손목이 뻐근할 만큼 묵직했다. 그것을 들고 서가 사이를 돌았다.
숙 님의 잔에는 진하게 우린 홍차. 잔 바닥이 비치지 않을 만큼 검붉다. 설탕은 넣지 않는다 — "단맛은 책장을 넘기는 손을 끈적이게 하니까요"라고 하신 뒤로, 그 잔만은 늘 맑게 둔다.
노아 씨의 잔에는 카페인이 옅은 허브차. 옅은 풀빛 김이 나른하게 피어올랐다. 사흘 밤을 새우고도 또 밤을 새우는 사람에게 진한 차를 내미는 건, 위로가 아니라 부추김이 된다.
츄니티 씨의 잔에는 쓴 커피. 볶은 콩의 탄내가 코끝을 찔렀다. 그 옆 작은 접시에는 마른 멸치 한 조각 — 이건 츄니티 씨 몫이 아니라, 발치의 먼지 씨 몫이다.
유라 씨의 잔에는, 오늘은 특별히 뜨거운 것을 골랐다. 잔을 감싸 쥐면 언 손끝이 녹을 만큼.
바깥에서 비를 맞고 돌아온 사람에게는, 뜨거운 것이 낫다.
사실 차만 준비한 것은 아니었다. 숙 님 자리에는 등받이 방석을, 노아 씨 책상에는 눈이 편한 갓등을, 유라 씨 어깨에는 보송하게 마른 담요를 하나씩 놓아 두었다.
숙 님은 자기 자리에 놓인 방석을 힐끗 보고도, 카탈로그 카드를 맞추던 손끝을 멈추지 않았다.
"흐음. 셰윌라 대원. 방석은 없어도 앉는 데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만."
"오래 앉아 계시잖아요. …그냥, 두세요."
숙 님은 더 말하지 않고 방석 위에 앉았다. 에두르는 사람에게는, 에두르지 않고 사물을 밀어 두는 편이 잘 통한다.
"…비가, 꽤 오네요."
유라 씨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평소보다 느린 말투였다.
"이런 밤에는, 순례길의 오솔길이 생각나요. 나무 밑에 모닥불을 피우면, 빗소리가 불소리랑 섞여서…"
거기까지 말하고, 유라 씨는 스스로도 조금 놀란 듯 입을 다물었다.
"…음. 차, 고마워요."
유라 씨가 이렇게 여러 마디를 잇는 건 드문 일이다. 비 오는 밤에만 열리는 문이 이 사람에게 하나 있는 모양이라고, 나는 조용히 수첩 한구석에 적어 두었다.
*— 유라 씨, 비 오는 밤에는 말이 길어짐. 오솔길, 모닥불.*
내 잔은, 늘 그렇듯 마지막이었다.
쟁반 끝에 올려 둔 다섯 번째 잔에 차를 따르고, 창가에 잠깐 내려놓았다. 나머지 넷을 다 돌리고 나면 마실 생각이었다.
그때 자료 하나를 분석연구실에서 대서고로 옮겨야 했다.
「 편린의 유광 」
나비 한 마리를 띄워, 얇은 자료 묶음을 맡겼다. 나비는 종이를 살포시 물고 서가 사이를 미끄러지듯 날았다.
문제는, 복도 창 하나가 빗물에 젖어 반쯤 열려 있었다는 것이다.
바람이 훅 들이쳤다.
빗물을 머금은 돌풍이 나비를 정면으로 후려쳤다.
*포슥.*
나비는 그대로 빛의 가루가 되어 흩어졌고, 물고 있던 자료가 허공에서 촤르르 풀렸다.
*촤라라락—*
수십 장의 종이가 빗바람을 타고 서가 사이로 날아올랐다.
"…아."
나는 쟁반을 내려놓을 새도 없이 종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유라 씨였다.
"흠흠. 우선 주위부터 수습하도록 해요."
한마디와 함께, 흩어지는 종이 서너 장을 정확히 낚아챘다. 순례로 단련된 손이었다.
츄니티 씨는 종이보다 먼저 자기 수첩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
"제 수첩은 안 돼요! 이건 홍보실 대외비란 말이에요!"
"…아무도 그 수첩은 안 노렸는데요."
노아 씨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조용히 종이들을 주워 모았다. 젖은 종이와 마른 종이를 손끝으로 구분해, 마른 것부터 차곡차곡.
그리고 숙 님은.
숙 님은 카운터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다만 손에는 이미, 같은 자료의 사본 한 부가 가지런히 들려 있었다.
"흐음. 그 자료라면, 어제 한 부 더 옮겨 적어 두었습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오늘 이럴 줄?"
"몰랐습니다. 다만 서고에서 종이란 언젠가 한 번은 날아가는 것이라서요. 어차피, 동선 안이니까요."
에두른 대답이었지만, 이번에는 옮길 것도 없었다. 이 사람은 그냥, 늘 한 발 먼저 준비해 두는 사람이었다.
"이건 홍보실 대외비인데 —"
어느새 츄니티 씨가 수첩을 다시 펼쳐 들고 있었다.
"오늘 밤, 편린의 유광 한 마리가 자료 운반 중 순직. 원인은 열린 창 하나. 목격자 넷. …이번 주 헤드라인 감이네요."
"순직이라뇨. 그냥, 조금 일찍 흩어진 것뿐이에요."
"흩어진 것과 순직한 것 중에, 뭐가 더 헤드라인 감일 것 같으세요?"
"…"
나는 답을 고르지 못했다.
"순직이에요. …라고 수첩에 적을게요."
먼지가 그 발치에서, 마른 멸치를 다 먹고 앞발을 얌전히 핥고 있었다.
종이는 곧 다 모였다. 그런데 나는 좀처럼 손을 멈추지 못했다.
한 장이라도 순서가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맞춰야 했다. 나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젖어 번진 글자까지 하나하나 성운서고의 점으로 띄워 원래 자리를 되짚었다.
"셰윌라 씨."
노아 씨가 나를 불렀다.
"그건 이미 숙 씨의 사본이 있습니다. 굳이 젖은 쪽을 살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아요. 그래도, 한 장이라도 그냥 두면."
나는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좀처럼 자리를 찾지 못했다.
"적어 두지 않으면… 없었던 일이 되니까요. 종이가 사라지면, 여기 이런 게 있었다는 것도 같이 사라져요. 그게, 저는 조금 무서워요."
말해 놓고 나니 멋쩍었다. 종이 몇 장에 할 말은 아니었다.
노아 씨는 잠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자기 몫으로 주워 둔 종이 더미를 내려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지워졌기 때문에,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네?"
"제가 어떤 것을 좇을 때 자주 하는 말입니다. 사라진 자리에는, 사라졌다는 흔적이 남지요. 그 흔적이 있다는 건 — 분명히 무언가 있었다는 뜻이고요."
나는 노아 씨를 바라보았다.
사라진 것을 좇는 사람이 이 분과에 하나 더 있다는 건, 언제 알아도 조금 든든하다.
"…셰윌라 씨 손끝이 젖었습니다."
"아, 이건 괜찮아요."
"괜찮지 않습니다. 이쪽부터 말리시죠."
정신을 차려 보니, 흩어졌던 종이는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그런데 내 수첩이, 어느새 젖어 있었다. 아까 종이를 줍느라 창가에 내려놓았던 것이 빗바람을 맞은 모양이었다.
나는 남의 자료는 그렇게 필사적으로 지키면서, 정작 내 것이 젖는 줄은 몰랐다.
"…이건 또 언제."
허둥지둥 수첩을 펼치는데, 노아 씨가 어느새 마른 천 한 장을 건넸다. 서가 그늘에서 조용히 꺼내 온 것이었다.
"각인되어 있는 건 젖지 않습니다. 하지만 종이는 다르지요. 이쪽은, 말려 두는 편이 낫습니다."
나는 천을 받아 눅눅해진 수첩을 눌러 닦았다. 다행히 글자는 번지지 않았다.
*— 유라 씨, 비 오는 밤에는 말이 길어짐. 오솔길, 모닥불.*
그 줄이 무사한 걸 보고, 안심했다.
비가 그친 건 자정 무렵이었다.
유리 천장 위로, 씻긴 하늘에 별이 하나둘 돋아났다.
손을 멈추고, 잠깐 그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별을 보는 순간이 나에게는 드물다. 밤을 새우다 문득 손이 멈추는, 아주 짧은 틈. 나는 언젠가 저 별을 다시 하늘로 돌려보내고 싶다고, 늘 그렇게 생각한다. 어떤 별들은, 있었다는 사실조차 지워진 채로 사라져 버리니까.
*스으—*
창틈으로 들어온 밤바람이, 식은 찻잔의 표면을 살짝 흔들었다.
그러다 나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창가에 내려놓았던 내 다섯 번째 잔이 — 아직도, 따뜻했다.
분명히 한참 전에 식었어야 하는 잔이었다. 나는 그걸 돌릴 겨를도 없이 종이를 줍고 있었으니까.
누군가 데워 놓은 것이다.
나는 서가 쪽을 돌아보았다. 숙 님은 카탈로그를 정렬하고 있었고, 노아 씨는 천을 개고 있었고, 유라 씨는 내 잔이 놓인 창가 쪽에 서서 말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고, 츄니티 씨는 수첩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아무도, 자기가 그랬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따뜻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잔 표면의 온기가 손바닥으로 천천히 배어들었다. 세어 두고 싶었지만, 누가 데웠는지는 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첩을 펼쳐, 오늘도 남의 이야기를 적었다.
*— 오늘, 내 잔을 누군가 데워 둠. 범인 미상.*
그 밑의 칸은, 오늘도 비워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