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ES// 지식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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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01 / 04

서장 — 이름만 남은 서고

대서고의 열람석은 생각보다 딱딱했다.

오래된 가죽을 씌운 등받이에서 서늘한 냉기가 등을 타고 올라왔다. 팔걸이는 수많은 손이 쥐었다 놓은 자리마다 반들반들 닳아, 손바닥에 매끄럽게 감겼다. 나는 그 닳은 자리를 만지작거리며, 무릎 위에서 두 손을 몇 번이나 쥐었다 폈다.

왜 하필 나일까. 그 생각이 아까부터 머리 위를 맴돌았다.

봉인의 탑 결계실 당직이 내 일이었다. 밤새 결계의 이음매를 들여다보고, 이따금 새어드는 마나 조각들과 조용히 인사를 나누는, 그런 조용한 자리. 전투 훈련에서 나는 늘 꼴찌였고, 그래서 지원 요청 한 번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 자리가 좋았다. 밤에 홀로 남으면, 마나들의 조잘거림에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섞여 나왔다. 순수한 아이처럼 엉뚱하고 귀여운 소리들이라, 가만히 듣다 보면 늘 그랬다.

전투는 아무리 연습해도 남들 발끝에 겨우 닿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아무도 나무라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오늘, 이 높고 서늘한 대서고에서 내 이름이 불렸다.

"에-, 엣토…… 정말 제가 맞나요?"

되물었지만, 옆자리에 앉은 애수화 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류를 다루는 아콘의 행정원답게, 제복 소맷단을 손끝으로 반듯하게 눌러 펴고, 팔목에 감긴 보라색 팔찌 매듭을 한 번 매만질 뿐이었다. 팔찌 알들이 스치며 *또르륵*, 아주 작은 소리를 냈다.

애수화 씨 앞에는 이미 서류 한 장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이 자리에 앉기도 전부터 거기 놓여 있었던 것처럼.

곁눈질로 스친 그 종이 한가운데, 유난히 하얀 빈 칸 하나가 눈에 걸렸다. 다른 칸은 잉크가 빽빽한데, 그 칸만 손도 대지 않은 듯 새하였다. 그게 뭔지는, 그때 몰랐다.

*또각, 또각.*

열람석 건너편에서 발소리가 다가왔다. 서가마다 꽂힌 책들이 낮은 금박을 흘리는 통로를 지나, 숙 사서님이 걸어왔다.

나를 보지 않았다. 손에 든 카탈로그 카드를 *탁, 탁*, 모서리끼리 두드려 가지런히 맞추면서, 내 발끝과 애수화 씨의 팔찌를 차례로 스쳐 지날 뿐이었다.

"흐음."

카드를 맞추던 손이 멈췄다.

"밀르아 대원. 결계실 근무 중에, 이따금 보이지 않는 것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들었습니다."

"핫! 넷…… 그, 그게 근무에 지장이 되진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지장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사서님의 입가가 아주 잠깐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인사치레는 아니었다. 내가 뭔가를 뒤늦게 알아차리길 기다리는 미소.

"이번 일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대원을 불렀습니다."

나는 그제야 옆자리를 제대로 돌아보았다.

애수화 씨가 펼쳐 둔 서류.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 글씨가 빼곡했다. 이름이 있었다. 날짜도. 무슨 일을 했는지까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그런데 딱 한 칸.

'사유'라고 인쇄된 칸만, 종이째 하얗게 비어 있었다. 마치 누가 그 자리만 오려 내고 새 종이를 덧댄 것처럼, 결도 무늬도 없이 매끈하게.

*지익—*

그 빈칸을 들여다보는 순간, 목 안쪽에서 낮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버릇. 긴장하면 늘 이랬다. 나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밀르아 대원."

숙 사서님의 목소리가 한 톤 낮게 가라앉았다.

"지금부터 여는 곳은, 실제 에린이 아닙니다."

카탈로그 카드를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나를 보았다.

"멸망한 가능성 하나를, 다시 펼쳐 읽는 겁니다. 있었을지도 모르는 끝을, ARES가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자리예요. 책으로 치면…… 아무도 끝까지 읽지 못한 채 덮인 쪽에 가깝습니다."

그 말끝에, 발밑 어딘가가 낮게 울렸다. 아주 깊은 곳에서 무거운 것이 천천히 떠오르는 듯한 진동이었다. 열람석 공기가 한 겹 묵직해졌고, 서가의 금박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에-, 그러면 저희는 그 책을 읽으러 가는 거네요."

"그렇게 말해도, 저는 굳이 반대하지 않습니다."

사서님의 손끝이 허공을 짚자, 우리를 저쪽으로 보낼 술식이 낮은 소리를 냈다.

*지이잉—*

푸른 결이 좌석 아래로 한 줄씩, 실을 감듯 정렬됐다. 발밑에서 서늘한 기운이 올라와 발목을 감쌌다.

"다만 규칙이 하나 있습니다. 저 안쪽에, 이쪽과 같은 사람이 이미 있으면 — 그 사람은 몸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 두 사람이 같은 자리에 닿는 순간, 펼친 책이 그대로 찢어지니까요."

열람석 옆, 서가 그늘에 서 있던 한 사람이 그제야 앞으로 나왔다. 회색 머리에,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린. 처음 본부에 전이되던 날, 어리버리한 나를 지휘탑 아래까지 데려다준 사람이었다.

"리레군 씨……?"

"오랜만입니다, 밀르아 대원."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우리가 들어갈 자리를 눈으로 짚으며, 담담히 말했다.

"안쪽에 있는 게 저라고 하더군요. 그러니 저는 여기 남겠습니다. 대신, 제 눈이 되어 주십시오."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 담담함이, 왠지 조금 쓸쓸하게 들렸다.

"…자, 그럼."

숙 사서님이 마지막 결을 짚었다.

"두 분의 발자국은, 제가 바깥에서 붙잡고 있겠습니다. 돌아올 길이 닫히기 전에 반드시 돌려보내 드릴 테니까요. 어차피 저는 여기 있을 예정이니."

푸른 결이 발밑에서 무릎까지 차올랐다.

대서고의 서늘한 가죽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코끝에서 왈칵 짙어졌다가—

*화악—*

한순간에 씻겨 나갔다.

*턱.*

가죽 등받이의 감촉이 사라지고, 딱딱하고 차가운 돌바닥이 발바닥을 밀어 올렸다. 종이 냄새 대신, 오래 닫아 둔 방에서 나는 곰팡내와 먼지 냄새가 콧속으로 밀려들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조용하다, 였다.

너무 조용해서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봉인의 탑 결계실도 고요한 곳이었지만, 그곳엔 언제나 마나들이 조잘거리는 소리가 있었다. 순수한 아이처럼 엉뚱하고, 귀여운 소리들이.

여기엔 그게 없었다. 소리가 있어야 할 자리마다, 두꺼운 솜을 눌러 둔 것 같은 적막만 고여 있었다.

고개를 드니, 천장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은 서가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책이 아니었다. 전부 보고서였다. 얇은 종이 뭉치들이 칸칸마다 빽빽하게 꽂혀, 어디가 끝인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위로, 안으로 이어졌다.

나는 가장 가까운 뭉치 하나를 조심스레 뽑아 들었다.

*스르륵.*

종이는 손끝에서 메마르게 바스러질 듯 얇았고, 잉크는 오래 말라 검게 굳어 있었다. 이름이 있었고, 날짜가 있었고, 무슨 일을 했는지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그리고 '사유' 칸이, 하얗게 비어 있었다.

다음 장도. 그다음 장도. 넘길 때마다 *사락, 사락*, 마른 소리만 손안에서 부서졌다.

"애수화 씨, 이거……."

"보여요."

애수화 씨는 이미 다른 서가 앞에 서 있었다. 손끝이 종이 위를 스치듯 지나갔지만, 결코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짚었다가, 데인 듯 곧 떼었다.

"이름은 남았어요. 한 일도 남았고요. 그런데 왜 그걸 했는지만…… 없어요."

말끝이 옅게 흐려졌다. 끝을 맺지 못하는 말투였다. 감정을 삼키는 사람이 그렇듯.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배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힘을 끌어올렸다.

「 성안 」

*화락—*

눈꺼풀 안쪽이 금빛으로 확 물들었다. 눈을 떴을 때, 세계가 한 겹 벗겨지듯 다르게 보였다. 눈 안쪽이 뜨겁게 데워졌다.

서가 사이사이, 빈 자리마다 흐릿한 형체들이 서 있었다. 사람의 윤곽을 닮았지만 얼굴은 없는, 반투명하게 일렁이는 마음의 조각들. 그것들이 지나갈 때마다, 살갗에 서늘한 바람이 스치는 것 같았다.

사념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조각들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전부, 한 방향으로 아주 천천히 끌려가고 있었다. 물이 소용돌이의 목으로 빨려들 듯. 발버둥도 없이, 소리도 없이. 어딘가 안쪽,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곳을 향해서.

"에-, 엣토…… 이 사람들, 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에요."

목소리가 떨렸다.

"끌려가고 있어요. 왜 여기 있었는지를…… 잊은 채로."

*띠링—*

그때, 시야 한구석에 낯선 문자가 떠올랐다. 감정 없는, 서고 안내판 같은 메마른 글씨였다.

「 보고서 제7,204호 — 완료 」

내가 손에 든 것과 똑같은, 옆 서가의 보고서 한 장. 그 위로 도장 하나가 내려앉았다.

*쿵.*

소리는 묵직했다. 그런데 붉은 인주가 번지는 대신, 종이가 가장자리부터 흐려지기 시작했다.

글씨가 지워지는 게 아니었다. 종이째, 있었다는 사실째, 색이 빠져나가—

*사아……*

빈 서가 칸만 남았다. 방금까지 무언가 꽂혀 있던 자리에, 먼지 한 톨 없는 매끈한 공백만.

나는 그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방금 전까지 목 안에서 맴돌던 콧노래가 뚝 끊겨 있었다.

……어라.

나, 여기 왜 왔더라.

봉인의 탑에서, 밤에, 누가 나를 불렀고…… 그래서 왔는데. 왜였지. 뭘 보려고 했지. 머릿속의 한 칸이, 방금 그 보고서처럼 하얗게 비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손끝이 서늘하게 식었다.

"밀르아 대원."

애수화 씨의 손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서늘한데, 단단했다.

"눈. 흐려지고 있어요."

*화락—*

금빛이 다시 또렷하게 돌아왔다. 동시에, 비어 가던 머릿속 한 칸이 제자리로 밀려 들어왔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폐가 먼지 낀 공기로 따갑게 부풀었다.

"하?! 저, 방금……."

"'완료'를 너무 가까이서 봤어요."

애수화 씨가 조용히 말했다. 시선은 흐려진 서가에 오래 머물렀다.

"이곳의 규칙인 것 같아요. 완료된 것만 남기고 — 아니."

말을 고쳐 잡았다.

"완료된 것만…… 지워요. 처리가 끝났으니, 더는 둘 이유가 없다는 듯이."

◈ 통신그럼 끝나지 않은 것은 남고, 끝난 것은 사라진다는 뜻입니까.

통신 너머, 리레군 씨의 목소리가 낮게 끼어들었다.

"네. 거꾸로예요."

애수화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미결이 위험하고 완료가 안전한데. 여긴 반대예요. 완료가 곧, 사라짐이에요."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성안 너머로 끌려가던 사념들이, 그제야 다르게 보였다.

저건 사라지러 가는 게 아니었다. 이미 '완료' 처리된 것들이, 지워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흘러가는 잔상이었다.

"애수화 씨. 이거…… 삭제잖아요."

내가 아는 단어를 꺼냈다. 본부에서 몇 번 들어본, 가장 무서운 말.

애수화 씨의 펜을 쥔 손이, 아주 짧게 멈췄다.

"……삭제. 맞아요. 그런데."

그녀가 하얗게 빈 사유 칸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아는 삭제는, 존재를 지워요. 이름부터, 있었다는 사실부터. 그런데 이건 — 대상이 존재가 아니라, 이유예요."

말끝이 다시 흐려졌다.

"제가 아는 그것과…… 달라요."

그 말을 하는 동안, 팔찌가 보라색에서 아주 옅은 하얀빛으로 한 번 흔들렸다가 가라앉았다. 나는 그게 무슨 신호인지 몰랐지만, 묻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띠링—*

또 그 안내판 글씨가 떠올랐다. 이번엔 우리 발밑이었다.

「 미등록 열람자 2명 감지 」

「 항목 생성 중…… 」

*차르륵—*

바닥에서 푸른 격자가 솟아, 우리 두 사람의 발을 둥글게 에워쌌다. 동시에 사방 서가의 보고서들이 일제히 떨렸다.

*사사사삭—*

수만 장의 종이가 한꺼번에 몸을 뒤척이는 소리. 그 모든 종이가 우리를 '읽으려' 고개를 드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감각이 목덜미를 훑었다.

"애수화 씨!"

"움직이지 마요."

애수화 씨가 내 소매를 붙들었다.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빠르게, 낮게 중얼거렸다.

"이곳은 서류로 움직이는 곳이에요. 그러면……."

발밑의 격자를 내려다보며, 우리를 감싼 그 항목 위에 손끝을 얹었다.

"이 항목은, 아직 아무 서류에도 접수되지 않았어요. 접수 전이면 — 규칙상 '보류'로 돌릴 수 있어요."

"에? 엣토, 그게 무슨……."

"이곳의 규칙을, 이곳의 규칙으로 막는 거예요."

애수화 씨가 격자 위에 손끝을 얹고, 규칙 한 줄을 낮게 읊었다.

"접수되지 않은 항목은, 처리할 수 없습니다."

그 목소리가 격자의 푸른 결을 타고 스며들었다. 성소가 제 말투를 고스란히 되돌려받은 듯 —

*지이잉……*

조여 오던 회전이 한순간 역방향으로 느려졌다. 솟아오르던 푸른 빛이 한 칸씩 사그라들고, 우리를 옥죄던 격자가 그 자리에 우뚝 멎었다.

팔찌가 보라색에서 하얀빛으로 물들었다가, 천천히 제 색으로 가라앉았다.

*철컥.*

푸른 격자가 우리를 다 에워싸기 직전에, 톱니가 어긋나듯 툭 끊겼다.

나는 참았던 숨을 뱉었다.

"하아…… 사, 살았다."

"아직요."

애수화 씨는 웃지 않았다.

우리를 에워싸려던 격자는 풀렸지만, 그 자리에 얇은 종이 한 장이 새로 떠올라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의 이름이 적힌, 방금 막 생성된 보고서였다. 잉크가 아직 젖어 반들거렸다.

이름이 있었다. 시각이 있었다. 적힌 건 '열람자, 무단 진입'.

그리고 그 위로, 도장 하나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쿵.*

'완료'가 아니었다.

「 미결 」

붉은 두 글자가, 젖은 잉크 위에서 선명하게 번졌다. 애수화 씨가 그 글씨를 오래 바라보았다.

"……우린 방금, 접수됐어요."

목소리가, 처음으로 아주 살짝 떨렸다.

"미결로."

나는 그게 왜 무서운 말인지 그때는 몰랐다. 미결이면, 아직 끝나지 않은 거니까. 끝나지 않았으면 지워지지 않으니까. 다행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성안 너머, 서가 저 안쪽에서 무언가가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끌려가던 사념들 사이, 유일하게 제 발로 서 있는 형체 하나가.

그리고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곳에서 미결은, 아직 처리되지 않았다.

처리를 —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