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2 / 04
중장 — 지우는 결재
'미결' 도장이 찍힌 종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젖은 잉크가 아직 마르지 않은 채, 우리 두 사람의 이름 아래에서 아주 천천히 맥을 뛰었다. 살아 있는 것처럼. 손끝으로 스치면 온기까지 느껴질 것 같은, 그런 맥박이었다.
*두근, 두근.*
종이 한 장이 심장을 대신 뛰는 소리를 냈다. 처리를 기다리는 소리였다.
"애수화 씨. 저희 이제 어떡해요."
"움직여요. 멈춰 있으면, 저쪽이 우리를 정리하기 더 쉬워지니까요."
애수화 씨가 앞장섰다.
*또각, 또각.*
그녀의 구두 굽이 돌바닥을 딛는 소리가 서고 안으로 퍼졌다가, 이내 두꺼운 적막에 삼켜졌다. 나는 성안을 뜬 채 그 뒤를 따랐다.
금빛으로 물든 시야 속에서, 서가는 살아 있었다. 책장 하나하나가 아주 느리게 자리를 바꾸고, 통로가 열렸다 닫혔다. 나무도 돌도 아닌, 낡은 종이 냄새를 풍기는 무언가가 몸을 뒤트는 감촉이었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이곳이 먼저 쟀다.
*띠링—*
「 반려 」
발밑 돌바닥이 먼저 낮게 울렸다. 애수화 씨와 나 사이, 아무것도 없던 통로 한복판에서 책장 한 벽이 통째로 솟아올랐다.
*끄드득—*
나무도 돌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 되는 낮고 무거운 마찰음이었다. 서가가 밀려 올라오는 틈으로, 오래 묵은 종이 먼지가 훅 끼쳐 왔다. 재채기가 날 만큼 짙었다.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는 힘이었다. 같이 있는 항목은, 따로 떼어 두면 처리하기 쉬우니까.
"밀르아 대원, 손."
애수화 씨가 서가 틈으로 손을 뻗었다. 좁아지는 틈 사이로 그녀의 손끝만 겨우 보였다.
나는 그 손을 붙잡았다. 서늘하고 가늘었지만, 힘주어 붙잡자 놓지 않을 만큼은 단단했다.
"떨어지지 않아야 해요. 여긴 혼자 남은 항목부터 결재하는 곳이에요."
"넷! 놓지 않을……."
나는 말을 삼켰다. 놓지 않겠다고, 다시 또박또박 고쳐 말했다.
우리를 가르려던 서가가, 맞잡은 손 앞에서 잠깐 멈칫했다. 나무가 손등을 스칠 듯 가까워졌다가, 삐걱이는 소리를 삼키며 멎었다. 두 항목이 하나로 묶여 있으면, 반려도 한 번에 밀어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서가 틈을 완전히 빠져나오자, 공기가 달라졌다. 방금까지 코를 찌르던 먼지 냄새 대신, 서늘하고 축축한 냄새가 발밑에서 올라왔다. 오래된 종이가 아니라, 오래된 물기의 냄새였다.
애수화 씨는 걸으면서도 눈을 바닥에 두었다.
서가 사이 통로에, 옅은 자국들이 나 있었다. 먼지가 유독 얇게 앉은 자리, 누가 지나간 발자국 같은 흔적.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밀르아 대원. 저거 보여요?"
「 하얀 발자국 」
애수화 씨의 팔찌가 보라색에서 하얀빛으로 물들었다.
*포르르—*
그 빛이 사그라드는 자리마다, 짙은 보라색 깃털이 흩날렸다. 깃털은 바닥에 닿기 전 사라졌지만, 그 궤적만은 남아 무언가 지나간 길을 되짚어 냈다. 애수화 씨는 그 길을 눈으로만 좇았다.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 힘을 쓰는 동안에는 손도 발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고, 예전에 스치듯 들은 적이 있었다.
"이상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흐려졌다.
"삭제라면, 흔적도 같이 없어져야 해요. 지워진 건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니까. 그런데……."
발자국은 끊기지 않았다. 사유 칸이 빈 보고서마다, 그 빈 칸에서 시작된 발자국이 한 방향으로 이어졌다. 발자국 하나하나가, 갓 찍힌 것처럼 또렷했다.
"지워진 게 아니에요. 어디론가 옮겨졌어요. 발자국이 남을 만큼, 분명하게."
나는 성안 너머로 그 길을 따라갔다. 서가 안쪽, 사념들이 끌려가던 바로 그 방향이었다.
*두근.*
가슴이 낮게 뛰었다. 그 끝에 무언가 있었다. 아직 보이지는 않았지만, 손끝에 닿을 듯 분명히, 있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발밑 돌바닥의 냉기가 짙어졌다. 앞서가던 애수화 씨의 발소리가 문득 두 배로 늘어난 것처럼 울렸다. 메아리가, 이상하게 컸다.
*띠링—*
「 이관 」
발밑이 갑자기 기울었다.
*쿠구궁—*
돌바닥 전체가 서랍처럼 밀려나는 소리였다. 낮은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무릎까지 올라왔다.
"핫?!"
바닥이 나를 옆 통로로 밀어냈다. 애수화 씨의 손이 미끄러졌다. 서류가 잘못 꽂힌 것을 다른 칸으로 옮기듯, 성소가 나를 통째로 다른 자리로 넘기려 했다.
발밑에서 서늘한 바람이 훅 끼쳐 올랐다. 몸이 붕 뜨는 듯한, 속이 울렁이는 감각이었다.
"밀르아 대원!"
◈ 통신밀르아 대원, 노래.
통신 너머에서 리레군 씨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 통신대원의 노래는 이곳 장부에 적히지 않습니다. 적히지 않는 건, 저쪽도 옮기지 못해요. 지금, 목이 기억하는 대로.
무슨 뜻인지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목 안쪽이 저절로 뜨거워졌다. 나는 숨을 들이켜고, 늘 그랬듯 나도 모르게 흘리던 그 소리를 냈다.
기울던 바닥이 잠깐 멈칫했다.
*기이잉—*
노랫결이 통로에 퍼지자, 나를 밀어내려던 힘이 잠깐 늦어졌다. 발밑의 진동이 잦아들며, 서랍이 도로 닫히듯 바닥이 천천히 제자리로 가라앉았다. 그 틈에 애수화 씨가 서가를 돌아 내 손목을 낚아챘다.
"……붙잡았어요."
그녀가 가쁜 숨을 골랐다. 손끝이 차가웠다.
"대원, 방금 그거. 이곳이 읽지 못하는 소리예요. 기억해 둬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아직 뛰고 있었다. 노래가, 이곳에서 유일하게 나를 지켜 줬다.
숨을 채 고르기도 전에, 시야 가장자리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이번엔, 이곳이 방식을 바꿨다.
*띠링—*
「 정정 」
시야의 금빛이 갑자기 흔들렸다.
*지지직—*
성안이었다. 사념도, 발자국도, 옮겨지는 이유의 흐름도 — 내가 보던 모든 것의 가장자리가, 타는 종이처럼 검게 말려 올라갔다. 그 안쪽부터 '오류'라는 붉은 글자가 스며 나왔다.
「 관측 항목: 근거 불충분 — 정정 」
"어? 에, 엣토, 보이지 않……."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려다, 나는 그 말을 삼켰다. 정말로 세계가 흐려지고 있었다.
눈앞의 서가도, 애수화 씨의 옆얼굴도, 윤곽부터 지워지듯 하얗게 새어 나갔다. 이곳이 내 눈을 '잘못된 기록'으로 판정하고, 지우려 들었다.
성안을 뜬 채로, 눈앞이 새하얘졌다. 무섭도록. 눈꺼풀 안쪽이 뜨겁던 감각마저 차게 식어 갔다.
"핫…… 아니에요, 이건 진짜인데. 제가 본 건 진짜인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성안은 원래 오래 뜨고 있으면 정신이 깎여 나간다. 관자놀이 안쪽이 조여드는 그 익숙한 통증 위에, 이곳이 '너는 잘못 보고 있다'고 밀어붙이자, 내가 본 것이 정말 헛것이었나 하는 의심까지 파고들었다.
무릎이 꺾였다.
"밀르아 대원!"
애수화 씨가 나를 받쳐 안았다. 팔에 닿은 그녀의 체온이, 하얗게 비어 가던 시야 속에서 유일하게 또렷한 감각이었다. 그러고는 아주 낮게, 내 귀에 대고 말했다.
"대원이 본 게 맞아요. 사념도, 발자국도, 제 눈에도 흔적이 남았어요. 저쪽이 '틀렸다'고 우기는 건, 대원이 제대로 봤기 때문이에요."
"……제가, 맞아요?"
"맞아요. 이곳이 지우고 싶을 만큼, 정확히 봤어요."
그 한마디에, 흐려지던 시야가 겨우 붙들렸다. 나는 이를 악물고 성안을 다시 밀어 올렸다.
*화락—*
금빛이 돌아왔다. '정정' 문자가 밀려났다. 대신 머릿속이 지끈 울리고, 발밑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정신력을 억지로 긁어 쓴 대가였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래도, 애수화 씨가 맞다고 해 줬으니까. 나는 노래를 아주 작게 흥얼거리며, 다시 앞을 봤다.
통로 끝에서, 공기가 달라졌다.
먼지 냄새 대신, 오래 마른 잉크 냄새가 짙게 감돌았다. 발소리마저 이곳에서는 멀리 가지 못하고 바로 앞에서 죽었다.
서가가 원을 그리며 물러나고, 한가운데 낮은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보고서가, 어른 키만큼 높이 위태롭게 서 있었다. 살짝만 스쳐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앞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회색 머리. 한쪽 눈을 가린 안대. 낡은 아콘의 제복.
나는 숨이 멎었다.
"리…… 리레군 씨?"
같은 얼굴이었다. 처음 본부에 왔던 날, 어리버리한 나를 지휘탑 아래까지 데려다준 그 사람.
그런데 아니었다.
그 사람보다 어깨가 더 야위었고, 제복 안의 몸이 옷의 부피만큼도 채우지 못했다. 회색 머리는 빗질 한 번 닿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자라, 목덜미를 지나 어깨까지 헝클어져 덮여 있었다. 오래, 아주 오래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의 몸이었다.
통신 너머에서, 리레군 씨의 숨소리가 얕게 굳었다.
◈ 통신……저건.
◈ 통신안쪽에 있는 게 저라던 말이, 저 사람이었군요.
책상 앞의 그가 고개를 들었다. 가린 눈 아래로, 흐린 금빛이 아지랑이처럼 새어 나왔다. 열기 없는 불꽃이 눈가에서만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나를 보는 것도, 내 뒤의 서류를 보는 것도 같았다.
"흐음."
낮고 절제된 목소리였다.
"미결이 둘. 오래 비워 둘 항목은 아니군요."
그의 손끝이 우리 쪽을 가리켰다. 손끝에서 희미한 금색 실이 뻗어 나왔다.
「 단 」
*서걱.*
내 옆의 허공이 잘렸다. 정확히는, 내가 여기 온 '이유'가 잘릴 뻔했다. 성안 너머로, 내 발밑에서 얇은 실 한 가닥이 끊어지려다 만 것이 보였다. 잘린 자리에서 금빛 가루가 흩날리듯 흩어졌다가, 잦아들었다.
"애수화 씨, 저 사람……!"
"알아요."
애수화 씨가 나를 등 뒤로 당겼다.
"저 손이, 이 세계의 이유를 전부 잘라 온 손이에요."
가능성의 리레군은 서두르지 않았다.
보고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손끝이 이미 그 모양을 외우고 있는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사유 칸을 짚었다. 이미 빈 칸이었다. 그런데도 도장을 들어 그 위로 내렸다.
「 완료 」
*쿵.*
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손을 떼자, 종이가 가장자리부터 흐려지며 사라졌다. 방금까지 손안에 있던 무게가, 그대로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린 것 같았다. 다음 장을 집었다.
"쓸데없는 게 너무 많습니다."
*탁.*
"적당히 덜어내 보죠."
그 말투가, 통신 너머 리레군 씨와 소름 끼치도록 똑같았다. 다정한 사람이 할 법한 말은 아니었는데, 목소리에는 미움이 없었다. 그저, 오래 반복한 일을 하는 사람의 건조함만 있었다.
나는 성안을 조금 더 깊이 떴다.
그의 가린 눈 안쪽이 보였다. 끝없이, 쉬지 않고 무언가가 밀려들고 있었다. 수백 겹으로 뭉개진 목소리들, 이름 모를 냄새가 뒤엉킨 덩어리. 한 번도 정리되지 못한 누군가의 마음까지. 그것들이 안대 천 올 사이로도 새어 나올 듯, 쉼 없이 안으로 밀려들었다.
그가 잘라 낸 수많은 이유들이, 그 눈 하나로 전부 흘러들어 쌓였다. 눈 안쪽의 금빛이, 밀려드는 것의 무게에 눌린 듯 자꾸만 일렁였다.
너무 많았다.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그 눈은 끌 수도, 감을 수도 없었다. 멈추지 않고 밀려드는 것들을, 그는 안대로 가린 채 고스란히 받아 내고 있었다.
"에-, 엣토…… 저 사람, 아파요."
"뭐라고요?"
"눈이. 계속 뭔가 들어와요. 멈추질 않아요. 저렇게 오래…… 혼자서."
애수화 씨가 잠깐 나를 돌아보았다. 그 눈에 처음으로, 사무적이지 않은 무언가가 스쳤다.
가능성의 리레군은 우리 대화를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그저 다음 장을 집었다. 또 다음 장을.
쌓인 보고서는 줄지 않았다. 한 장을 완료하면, 어딘가에서 새 한 장이 소리 없이 올라와 그 자리를 채웠다. 그는 끝나지 않을 일을, 끝낼 생각 없이 했다.
아니, 끝내지 말아야 하는 일을, 끝나지 않게 붙들고 있었다.
성안에 잡힌 사념 하나가, 책상 근처에서 아직 흐려지지 않은 채 떨었다. 완료 도장을 아직 맞지 않은, 이유를 반쯤 잃은 조각. 다른 사념들처럼 한 방향으로 끌려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파르르 떨리고만 있었다.
저 하나만이라도.
그 조각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이, 목 안쪽이 저절로 뜨거워졌다. 나도 모르게 목에서 노랫결이 새어 나왔다. 멈추려 해도, 이번엔 멈춰지지 않았다.
*기이잉—*
노랫결이 사념에 닿자, 흐려지던 윤곽이 잠깐 또렷해졌다. 옅어졌던 색이 한 겹 덧입혀지듯 짙어졌다. 잃어버린 이유의 한 조각이, 다시 매개를 얻은 것처럼 반짝였다.
그 반짝임을, 애수화 씨가 놓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보고서의 빈 사유 칸에 펜을 얹었다.
*사각.*
펜촉이 마른 종이 위를 긁는 소리가, 이 넓은 서고에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려서'."
그녀가 한 줄을 적었다. 되살아난 사념이 준 이유를, 종이에 되돌려 놓았다.
빈 칸이 채워졌다. 검은 잉크가 하얀 여백을 메우며, 아직 축축하게 반짝였다.
우리는 해냈다고 생각했다. 나는 웃을 뻔했다.
*띠링—*
「 신규 기입 감지 」
「 완료 」
애수화 씨가 방금 채운 그 칸 위로, 완료 도장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쿵.*
소리는 방금 전 리레군의 손에서 들었던 것과 똑같이 낮고 묵직했다. 종이가 가장자리부터 흐려졌다.
*사아……*
되살린 사념도, 되적은 이유도, 함께 지워졌다. 빈 서가만 남았다. 먼지 한 톨 없는, 서장에서 보았던 그 매끈한 공백 그대로.
나는 그 자리를 멍하니 봤다.
"어…… 왜……."
애수화 씨의 펜이 허공에서 굳었다.
시간이 이상하게 느리게 갔다. 그녀의 손끝에서 잉크 한 방울이 맺혔다가, 아주 천천히 종이 위로 떨어졌다.
"우리가 적으면."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우리가 적는 순간, 그게 새 항목이 돼요. 새 항목은 처리 대상이 되고요. 그러면……."
그녀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대신 내가, 삼키고 싶은 말을 대신 뱉었다.
"우리가 지우고 있었어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귀 안쪽에서 낮은 이명이 울렸다. 서고의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아득히 멀어졌다가, 다시 밀려들었다.
살리려고 적은 것이, 오히려 완료 처리되어 사라졌다. 우리가 손을 댈수록, 이 세계는 더 빨리 지워지고 있었다.
무릎에 힘이 풀렸다. 손끝이 차게 식었다. 여기 들어와서 우리가 한 일이, 전부 반대였다니. 나는 노래를 멈추지도 못하고, 흐느끼듯 흥얼거렸다.
가능성의 리레군이, 그제야 처음으로 우리를 오래 보았다.
"이제 알겠습니까."
낮은 목소리였다.
"남기려 들면, 접수됩니다. 접수되면, 완료됩니다. 완료되면……."
그가 다음 장을 집었다.
"사라지죠. 그러니 남기지 않아야 합니다. 덜어내야 합니다. 이 안에서 무언가를 지키는 방법은, 그것 하나뿐입니다."
그 말은 우리를 향한 경고 같기도, 자기 자신에게 오래 되뇌어 온 주문 같기도 했다.
그 순간, 애수화 씨의 어깨가 흔들렸다.
"애수화…… 씨?"
그녀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펜을 쥔 손이었다. 그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제가…… 왜 여기 왔죠."
성안 너머로, 나는 봤다. 그녀의 몸에서 흐릿한 문장 하나가 떠올라 있었다. 그 한가운데가, 서장의 그 사유 칸처럼 결도 무늬도 없이 매끈하게, 하얗게 비어 가고 있었다.
이곳에 오래 있을수록, 그녀도 왜 이곳에 왔는지를 잊어 갔다. 이름과 시각은 남기고 이유부터 지우는 이곳의 규칙이, 산 사람의 이유에도 스며들었다.
"애수화 씨! 정신 차려요!"
"……밀르아 대원. 저는 분명, 무언가를 찾으러……."
그녀의 눈이 초점을 잃었다. 펜이 손끝에서 흘러내릴 뻔했다.
*달그락.*
책상 모서리에 부딪힌 펜이, 떨어지기 직전에 겨우 멈췄다.
*지익.*
◈ 통신애수화 대원.
통신 너머에서, 리레군 씨의 목소리가 낮고 단단하게 파고들었다.
◈ 통신당신은 남기는 사람입니다. 남겨야 할 것은 남긴다고, 늘 그렇게 말했지요. 그 말을 한 이유까지 잊지는 마십시오.
애수화 씨의 펜을 쥔 손이, 아주 조금 떨렸다.
◈ 통신당신이 이 안으로 들어간 건, 지워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였습니다. 그 사실만은, 제가 바깥에서 붙잡고 있겠습니다. 그러니 대원은 앞만 보십시오.
흐려지던 문장이, 한 글자씩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얗게 매끈하던 자리에, 획 하나하나가 다시 짙게 스며들었다.
애수화 씨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팔찌가 하얀빛으로 잠깐 물들었다가, 다시 보라색으로 가라앉았다.
"……고맙습니다, 리레군 대원."
그녀의 목소리가 겨우 돌아왔다. 여전히 낮았지만, 더는 갈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이상한 것을 느꼈다.
지우는 일을 하는 사람이, 지워지려는 사람을 붙잡고 있었다. 안쪽의 리레군은 세계의 이유를 잘라 내는데, 바깥의 리레군은 애수화 씨의 이유를 붙들어 주었다.
같은 얼굴, 같은 손이었는데.
하나는 덜어내고, 하나는 붙잡는다. 나는 그 둘이 정말 다른 일을 하는 건지, 아니면 결국 같은 마음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안쪽의 리레군을 보았다.
그가 잘라 낸 이유들은, 어디로 갔을까. 삭제라면 흔적도 없어야 했는데, 애수화 씨의 발자국은 분명 한 방향으로 이어져 있었다.
성안을 뜬 채, 나는 그 발자국의 끝을 다시 따라갔다.
책상 뒤. 그가 앉은 자리 너머. 서가 가장 깊은 곳에, 보고서 딱 한 장이 다른 것들과 떨어져 놓여 있었다.
산더미 같은 다른 보고서들과 달리, 그 한 장만 가장자리가 반들거릴 만큼 낡아 있었다. 수없이 손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처럼.
그 한 장으로, 세상의 모든 발자국이 모여들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가 또 한 장에 도장을 내렸다.
*쿵.*
성안 너머로, 나는 똑똑히 보았다. 완료 도장이 사유 칸에 닿는 순간, 그 자리에서 희미한 빛의 결 하나가 실처럼 풀려 나왔다. 잘려 나간 이유였다.
그것은 허공으로 흩어지지 않았다. 낮게 빨려드는 소리와 함께, 서가 저 뒤편 한 장을 향해 곧게 딸려 갔다.
*스으—*
지우는 게 아니었다. 도장을 찍을 때마다, 저 낡은 한 장이 잘린 이유를 한 올씩 삼키고 있었다.
"……덜어낸 게 아니잖아요."
내 입에서 그 말이 새어 나왔다.
가능성의 리레군의 손이, 도장을 든 채 아주 잠깐 멈췄다.
"지운 게…… 아니에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기, 저 한 장에 전부 옮겨 뒀잖아요. 지우는 척하면서, 몰래…… 이곳이 가져가지 못하는 곳에. 혼자서, 계속."
책상 위의 도장이 낮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가능성의 리레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오래, 아주 오래 나를 보았다. 가린 눈 아래 금빛이 잘게 떨렸다. 안대 위로도 새어 나올 만큼, 그 떨림이 짙었다.
"……잊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직이 말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저는, 잊지 않았습니다. 전부. 한 명도 빠짐없이. 이름도, 얼굴도, 그 사람이 왜 그 자리에 있었는지도."
그러더니, 다시 도장을 고쳐 쥐었다.
목소리에서 방금의 떨림이 지워졌다. 그가 우리 두 사람의 '미결' 항목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더는, 늘려 둘 수 없습니다. 지킬 수 있는 자리가, 이제 한 장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도장을 쥔 그의 손이, 아주 천천히 떠올랐다.
*탁.*
도장이 우리 이름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젖은 인주 냄새가, 처음으로 이 서고에서 진하게 풍겼다.
"형제의 이유부터, 결재하겠습니다."
성안 너머로, 나는 봤다. 그 도장이 우리를 지우려는 게 아니었다. 방금 그 이유들이 빨려 들어가던 것처럼 — 우리마저, 저 뒤편 한 장으로 옮겨 담으려는 것이었다.
그가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우리를, 이 세계의 마지막 안전한 자리에, 함께 넣어 두려고.
그건 위협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그가 아는 가장 다정한 방식의, 구조 요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