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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04 / 04

후일담 — 빈칸에 남긴 한 줄

대서고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돌아온 것은 통증이었다.

목 끝에 옅게 남아 있던 노랫소리가, 잦아드는 그 짧은 순간 사이로 지끈거림이 밀고 들어왔다. 관자놀이가 뻐근하게 조여 왔고, 눈 안쪽은 오래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성안을 너무 오래 뜬 대가였다. 베인 상처는 아니었다. 그저 머릿속 안쪽 어딘가가, 오래 켜 둔 등처럼 뜨겁게 달아 있었다.

나는 열람석 팔걸이를 꽉 쥐고, 한동안 숨만 골랐다.

낡은 가죽이 손바닥 아래에서 서늘하게 식어 있다가, 숨을 고르는 사이 천천히 미지근해졌다.

코끝으로 익숙한 냄새가 밀려들었다. 마른 종이 냄새, 오래된 가죽 냄새, 살짝 눅눅한 잉크 냄새 — 기록성소에 배어 있던 곰팡내와는 달랐다. 이건, 살아 있는 것들의 냄새였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귓가엔 아직도 완료 도장이 떨어지던 낮은 소리가 맴돌았다.

"으…… 머리가."

숙 사서님이 마른 카드 모서리를 두 번 가지런히 두드리다, 내 쪽에서 손을 멈췄다.

"아프십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문득 웃음이 났다.

"넷…… 아파요. 근데, 아파서 다행이에요."

그곳에서는 아파도 지워졌으니까. 아픔조차 '오류'라며 정정당했으니까. 지금 이 지끈거림은, 내가 온전히 돌아왔다는 증거였다. 지워지지 않는 아픔이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다.

숙 사서님이 카탈로그 카드의 모서리를 다시 가지런히 맞췄다. 그 손이 잠깐 멈췄다.

"……좋은 대가군요. 아픔이 남았다는 건, 대원이 무언가를 제대로 지고 왔다는 뜻이니까요."

*또르륵.*

옆자리에서, 애수화 씨의 팔찌 알들이 낮게 부딪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제일 먼저 제 손부터 내려다보았다. 펜을 쥐고 있던 손이었다.

손끝으로 팔찌 알을 하나하나 짚어 세듯 확인하고, 구겨진 소맷단을 몇 번이나 반듯하게 눌러 폈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아주 오래 허공의 한 점을 응시했다.

"애수화 씨, 괜찮으세요?"

"……네."

짧은 대답이었다. 그 눈에, 내가 다 읽지 못하는 무언가가 스쳤다.

그곳에서 애수화 씨는 온 까닭을 잊을 뻔했다. 리레군 씨가 되불러 줘서 겨우 붙잡았다.

지금 그 눈은, 그것과는 다른 데를 보고 있었다. 오래되고 깊은 곳에 비어 있는 자리를.

팔찌가 보라색에서 하얀빛으로 아주 잠깐 흔들리며, 가느다란 보라색 실 한 가닥을 흘렸다가 이내 도로 삼켰다. 무언가를 추적하려다 만 손짓이었다. 오래전 잃어버린 흔적을 더듬으려다 만 듯했다.

나는 성안을 뜨지 않았다. 뜰 힘도 없었고, 무엇보다 — 그녀가 지금 들여다보는 그 빈자리를, 함부로 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건 애수화 씨만의 오래된 사연이었으니까.

대서고의 미지근한 공기가, 우리 두 사람 사이에 가만히 고여 있었다. 기록성소의 그 서늘한 적막과는 달랐다.

"애수화 씨도, 무언가를 찾고 계시죠."

내 입에서 그 말이 조용히 새어 나왔다.

애수화 씨가 나를 보았다. 부정하지 않았다.

"……언젠가, 찾으면. 그건 남겨 둘 거예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지워지지 않는 곳에. 이번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 안에서 배웠거든요. 남기는 것과, 붙잡는 것이 다르다는 걸."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알지는 못했다. 그래도 나는, 그녀의 손을 한 번 꼭 쥐었다.

펜을 쥐었던 손끝에, 마른 잉크가 아직 옅게 묻어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가 내 손을 붙잡아 줬던 것처럼.

접속 좌석 아래, 우리를 저편으로 밀어 보냈던 그 낮은 잔향이 이번엔 반대로 잦아들고 있었다. 마치 문 하나가 저 스스로 닫히는 것처럼.

그 곁에, 리레군 씨가 서 있었다.

한쪽 눈을 가린 낡은 안대, 회색 머리. 그곳의 그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눈에는, 방금 무언가를 잔뜩 받아 든 사람의 무게가 어려 있었다. 안대 밖으로 드러난 관자놀이 근처가, 미세하게 당겨져 있었다.

"리레군 씨. 저쪽의…… 리레군 씨는."

"넘겨받았습니다."

낮고 절제된 목소리였다. 그 안에 옅은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가 지키던 이유들을. 전부는 아닙니다. 통신선이 감당한 만큼만. 그래도, 여기 있습니다."

그가 제 관자놀이 근처를 가볍게 짚었다. 손끝이 닿은 자리를, 무거운 것을 눌러 확인하듯 잠깐 머물렀다.

"이제 이건, 그의 것이 아니라 제 기억입니다. 그가 몇백 년 혼자 붙잡고 있던 것을, 이제 제가 대신 붙잡습니다."

나는 그 말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힘들지 않으세요? 저쪽 리레군 씨는, 그거 이고 있느라 그렇게 오래……."

"힘들지요."

담담히 인정했다. 그러고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건조한 위트가 섞인 웃음이었다.

"그래도 저는 혼자가 아니니까요. 그가 혼자 진 것을, 저는 여럿이 함께 나눠 질 수 있습니다. 그 차이가, 생각보다 큽니다."

잠깐 눈을 감았다. 감기는 눈꺼풀이 아주 짧게 떨렸다.

이 사람의 눈은, 감을 수 있었다. 그곳의 그는 끝까지 감지 못했던 눈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직이 되뇌었다. 그곳의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이제 이 사람이 이어받아 말하고 있었다.

이제 그건, 혼자 품는 다짐을 넘어 넘겨받은 자의 약속이 되어 있었다.

나는 문득, 그곳의 리레군 씨가 마지막에 지었던 미소를 떠올렸다. 그 미소가, 지금 이 사람의 희미한 웃음과 겹쳐졌다.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하나는 혼자 짊어지다 놓았고, 하나는 여럿과 나눠 들기로 했을 뿐.

숙 사서님이 접속 기록을 손끝으로 정리했다. 마른 종이 카드가 손끝에서 넘어갈 때마다, 낮은 소리가 대서고의 정적을 가늘게 갈랐다.

기록성소에서 가지고 나온 건 손에 쥘 물건이 아니었다. 리레군 씨의 기억 속으로 옮겨진 이유들, 우리 세 사람이 겪고 온 관측의 잔상. 그게 전부였다.

"이 기록은."

숙 사서님이 카드 한 장을 접었다.

"제한 열람으로 두겠습니다. 아무 데나 펼쳐 둘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덮어 두는 거예요?"

내가 물었다.

숙 사서님이 나를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뒤늦게 의미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그 미소를 지었다.

"덮는 것과, 잊는 것은 다릅니다."

그가 카드를 제자리에 꽂았다. 카드가 향한 곳은, 유난히 두꺼운 가죽 표지의 서류철이었다. 손때 하나 없이 깨끗한, 좀처럼 열리지 않는 표지였다. 낮은 마찰음이 짧게 남았다가 사라졌다.

"아무나 열지는 못하게 하되, 필요한 사람이 찾아오면 반드시 꺼내 주겠다는 뜻이니까요."

나는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그곳의 리레군 씨도, 어쩌면 같은 일을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아무도 열지 못하게 한 장에 이유를 숨겨 두고, 언젠가 누군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높은 창으로 오후 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서가에 앉은 먼지를 옅은 금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문득,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노래밖에 할 줄 모르는 손이었다. 손바닥에는 굳은살 하나 없었다.

전투에서는 늘 꼴찌였고, 기록은 애수화 씨나 노아 씨 같은 사람들의 몫이라고, 나는 늘 그렇게 여겼다.

나는 그저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흘리는 사람일 뿐이라고. 아무 데도 쓸모가 없다고.

그런데 그곳에서, 그 노래가 유일하게 무언가를 지켜 냈다. 마음대로 되지 않아 부끄러웠던 그 버릇이, 이곳이 못 읽는 유일한 소리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숙 사서님에게 물었다.

"저기…… 사서님. 제가 뭘 하나 남겨도 될까요."

"무엇을요?"

"그…… 저쪽의 리레군 씨가, 마지막에 웃었거든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요. 그 얼굴을, 어디에도 적지 않으면……."

말끝이 흐려졌다. 그 얼굴마저 아무 데도 남지 않으면, 정말로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아서.

숙 사서님이 카탈로그 카드 한 장과 펜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펜대는 생각보다 묵직했고, 오래 쓰인 나뭇결이 손끝에 닿았다.

"적으십시오."

그가 말했다.

"적지 않는 것도 기록의 한 방식이라고, 저는 늘 그렇게 말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손이, 카드 위에 아주 잠깐 머물렀다.

"어떤 것은, 적어야만 남습니다. 대원이 지금 그렇게 느꼈다면, 그건 적어야 하는 쪽입니다."

나는 펜을 쥐었다.

노래가 아니라 손으로 무언가를 남기는 건, 처음이었다. 손끝이 어색하게 떨렸다. 아까 통증에 떨리던 것과는 다른 떨림이었다.

무자각으로 새어 나오던 노래와 달리, 이건 온전히 내 의지로 하는 일이었다. 낯설고, 조금 무서웠다.

내가 적은 것이 틀리면 어쩌나, 그런 걱정까지 들었다.

무엇을 적어야 할지 한참 고민하다, 나는 펜촉을 카드에 눌렀다.

*사각, 사각.*

마른 종이 위로 잉크가 옅게 번졌다가, 이내 결을 따라 스며들었다. 코끝에 잉크 냄새가 살짝 매캐하게 번졌다. 손끝으로 종이의 결이 미세하게 걸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아주 짧게 적었다.

'이 자리를 끝까지 지킨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웃으며 떠났다.'

이름은 적지 못했다. 그곳의 그에게는, 끝내 온전한 이름표가 붙지 못했으니까. '완료되지 않는 이름'인 채로 그는 떠났다.

그래서 이름 자리는, 비워 두었다.

손끝으로 그 빈자리를 한 번 쓸어 보았다. 기록성소에서 본 하얀 사유 칸은 결도 무늬도 없이 매끈했는데, 이 여백은 종이 결이 그대로 만져졌다. 지워서 사라진 자리가 아니라, 아직 아무도 채우지 않은 자리였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늘 모자란다고만 여겼던 내가, 잃기만 하던 자리에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온전히 남긴 기분이었다.

애수화 씨가 그 카드를 흘긋 보고는, 아주 옅게 웃었다.

"……잘 적었어요, 밀르아 대원."

칭찬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귓불이 화끈 달아올랐다. 속으로는 조금, 아니 많이 울컥했지만.

그때였다.

따뜻하던 공기가 한순간 서늘하게 식었다. 창으로 들던 금빛도 잠깐 옅어졌다.

성안을 뜨지도 않았는데, 시야 가장자리에 무언가가 스쳤다.

숨이 저절로 멎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 이상하게 길게 늘어졌다.

대서고의 푸른 문 너머, 아직 아무도 발 디딘 적 없는 서가 저편 — 검은 그림자 하나가 이쪽을 등지고 서 있는 것 같았다. 빛을 반사하지 않는, 오히려 주변의 빛을 조금씩 빨아들이는 것 같은 어둠이었다.

기록성소에서 본, 이유를 잃고 끌려가던 사념들과는 달랐다. 그건 갈 곳을 잃은 마음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무언가를 지우기 위해 거기 있는 것 같은. 이유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노리는 것 같은.

봉인의 탑에서 이따금 마주치던 '불청객'들. 그중에서도, 절대 마주쳐서는 안 된다고 몸이 먼저 경고하던 종류였다.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지익.*

"핫……!"

내가 숨을 들이켠 순간, 그림자는 이미 사라졌다. 성안도 뜨지 않았으니, 정말 본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밀르아 대원?"

"아, 아니에요. 그냥…… 눈이 아직 얼얼해서, 헛것을 봤나 봐요."

나는 애써 밝게 웃었다.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등줄기의 서늘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유를 지우는 세계를 하나 보고 왔다. 그 그림자는 달랐다. 이유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지우려는 것 같았다. 이름도, 있었다는 사실도, 전부. 생각만 해도 아득해지는 종류의.

나는 그 생각을 애써 접었다. 오늘은, 여기까지였으니까.

창밖 빛이 어느새 옅은 붉은빛으로 기울어 있었다. 대서고에도 저녁이 오고 있었다.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대서고 저편, 아무도 앉지 않은 푸른 열람석 하나가 아주 천천히 뒤로 밀려나는 것이 보였다. 돌바닥을 낮게 긁는 소리가, 대서고 전체에 옅게 퍼졌다가 사그라들었다.

누가 앉으려는 것도, 일어서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 자리가 스스로 조금 물러났다.

*둥—*

어디선가, 낮고 차가운 잠금음이 한 번 울렸다. 그 소리는 귀보다 먼저, 발바닥으로 전해졌다.

아주 두꺼운 벽 저편, 높고 먼 곳에서 오는 울림이었다. 다음 문 하나가 조용히 잠기거나, 열리기를 기다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리레군 씨도 그 열람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숙 사서님의 손도 잠깐 멈췄다.

"……저 자리는."

내가 묻자, 숙 사서님이 짧게 답했다.

"아직 아무도 읽지 않은 쪽입니다."

그가 카탈로그 카드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 두죠. 책은 도망가지 않으니까요."

나는 마지막으로, 내가 남긴 카드를 한 번 더 보았다.

이름 자리가 비어 있는, 그 짧은 한 줄.

완료되지 않은 채로, 그러나 분명히 남은 기록.

관자놀이의 지끈거림은 어느새 가셔 있었다. 대신 손끝에, 마른 잉크 냄새만 옅게 남아 있었다. 아까와 달리, 이번엔 그 냄새가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그거면 됐다고, 나는 생각했다.

적어도 이 한 줄은, 아무도 지우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계속 적어 나갈 것 같았다. 지워지는 것들 앞에서, 노래 대신 손으로도.

그게, 내가 그곳에서 배워 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