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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03 / 04

종장 — 완료되지 않는 이름

도장이 우리 이름 위로 천천히 내려왔다.

나무 손잡이에 새긴 글자가 낡아 반들거렸다. 손끝 하나 떨림 없이, 그것이 종이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책상 위 다른 소음은 전부 잦아든 채였다. 서가 전체가 숨을 죽이고 그 손끝만 바라보았다.

나는 성안을 뜬 채 그 궤적을 좇았다. 눈 안쪽이 계속 뜨겁게 익어 갔지만, 지금 감으면 다시는 못 볼 것 같아서 억지로 버텼다.

*쿵.*

도장이 종이에 닿았다. 그 순간, 우리 두 사람의 이유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 이번에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책상 뒤. 서가 가장 깊은 곳. 다른 것들과 멀찍이 떨어져, 홀로 놓인 보고서 한 장.

마른 잉크 냄새가, 그 방향에서부터 유독 짙게 풍겨 왔다.

*사사삭—*

사방 서가에서, 이유를 잃은 사념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얼굴 없는 그림자들이 실처럼 가늘게 풀려, 전부 그 한 장을 향해 흘러들었다. 발자국도 함께였다. 짙은 보라색 깃털이 바닥마다 새겨진 흔적을 따라, 수백 갈래로 갈라졌던 길이 단 하나로 좁혀졌다. 여기서 저기까지, 서른 걸음도 채 되지 않는 거리였다. 그런데 그 짧은 거리를, 세상 전체의 이유가 건너가고 있었다.

"애수화 씨. 저기예요."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방향을 가리켰다. 손끝이 허공을 짚는 동안에도, 눈은 그 흐름에서 떼지 못했다.

"잘려 나간 이유가 전부, 저 한 장으로 가고 있어요. 지워진 게 아니라…… 저기 숨겨져 있어요."

애수화 씨가 성안 대신 제 발자국을 좇았다. 팔찌 알이 *또르륵* 스치며 보라색에서 하얀빛으로 옮아갔고, 짙은 보라색 깃털이 그 한 장을 향해 길게 흩날렸다.

"……맞아요. 전부 저기로 모여요."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저 사람은, 세상의 이유를 전부 저 한 장에 이고 있었어요. 혼자서."

정적이 한 겹 더 내려앉았다.

가능성의 리레군이, 우리 시선을 따라 제 뒤편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도장을 고쳐 쥐었다.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나무 손잡이에는 눌린 자국이 깊었다. 그 오랜 세월을 쥐고도 놓지 못한 손이었다.

"보지 마십시오."

낮은 목소리였다.

"그건 이제 아무도 열 수 없는 항목입니다. 열면, 접수됩니다. 접수되면……."

"완료되고, 사라지죠."

내가 그 말을 대신 끝맺었다.

그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성안 너머로, 나는 그 한 장을 더 깊이 들여다보았다. 종이는 겹겹이 접혀 있었다. 몇백 겹이나 될까, 세는 것을 포기할 만큼 두꺼웠다. 그 겹 하나하나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념이 눌려 있었다. 종이 가장자리는 하도 접혔다 펴지길 반복해, 손끝에 닿으면 상처 자국처럼 우툴두툴하게 만져질 것 같았다. 얼굴은 없었다. 이름도 흐렸다. 그래도 저마다 이유를 하나씩 품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린 이유.

문을 끝까지 지킨 이유.

마지막까지 누군가의 손을 놓지 않은 이유마저.

낯익은 결 하나. 본부에서 스치듯 본 적 있는 온기였다. 누구의 것인지 짚어 내기도 전에, 그 결은 다시 겹 속으로 가라앉았다.

성안은 그 하나하나를 다 보여주지 않았다. 얼굴도, 이름도 흐린 채였다. 그저 '누군가가 여기 있었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온기만이, 종이 겹 사이에서 아득하게 배어 나왔다. 차가운 서고 안에서, 그 한 장만 미열을 품은 것처럼 느껴졌다.

이 세계가 이유부터 죽어 갈 때, 유한한 사람들은 저마다의 까닭을 잃고 하나씩 멈췄다. 그런데 이 사람은, 죽지도 못하는 몸으로 홀로 남아, 멈춰 가는 이들의 이유를 하나씩 잘라 제 품으로 옮겼다. 시스템이 완료 처리해 지워 버리기 전에, 저 한 장으로 빼돌렸다.

"덜어낸 게 아니었어요."

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목이 잠겨 말끝이 갈라졌다.

"당신은, 전부 기억하려고 그런 거예요. 지우는 척하면서, 한 명도 못 잊어서."

책상 위의 도장이, 종이에 닿기 직전에 멈췄다.

"……잊지 않았습니다."

가능성의 리레군이 나직이 말했다.

"저는 잊지 않았습니다. 전부. 그 사람들이 왜 그 자리에 있었는지, 왜 끝까지 버텼는지. 이곳이 부차 정보라며 잘라 내려 할 때마다, 제가 먼저 잘라서 여기 옮겼습니다."

가린 눈 아래로, 금빛이 흘러넘쳤다. 뜨겁게 고인 것이 둑을 넘듯, 안대 가장자리를 타고 번져 내렸다. 따뜻해야 할 그것이, 뺨에서는 얼음처럼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남지 않으니까요. 이름만 남고, 그들이 왜 살았는지는 전부 지워지니까요. 나는 그게…… 견딜 수 없었습니다."

*지익.*

통신선이 옅게 울렸다.

◈ 통신……그랬군요.

통신 너머에서, 현재의 리레군 씨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 통신저였다면, 저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잊지 않으려고, 지우는 사람이 됐겠지요.

두 목소리가 같았다. 같은 사람이, 안과 밖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안쪽의 리레군이 왜 저렇게 오래 버텼는지. 왜 그 눈을 끄지도 못한 채, 끝나지 않는 결재를 계속했는지.

그는 세계의 장례를 혼자 치르고 있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세계를, 저 혼자 기억하겠다고. 조문객도 없는 장례를, 몇백 년째 혼자.

그 오랜 시간을 상상하자, 나는 목이 메었다. 나라면 진작 무너졌을 것이다. 이 사람은 무너지지도 못했다. 무너질 틈조차 없었다.

"애수화 씨. 저 사람을 도우려면요."

나는 성안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말했다. 눈 안쪽 열기가 관자놀이까지 퍼져,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그래도 감을 수 없었다. 지금 눈을 감으면, 저 한 장이 어디로 흐르는지 놓칠 테니까.

"우리가 적으면 안 돼요. 적으면 완료되니까. 그러면……."

"이곳이 못 읽는 걸로."

애수화 씨가 내 말을 받았다. 그녀의 눈이 처음으로 또렷하게 빛났다.

방금 완료 도장이 찍히던 그 낮은 소리가, 아직 귓가에 맴돌았다. 여기서 한 글자라도 적는 순간 저 도장이 다시 내려올 것을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대원의 노래. 이곳 장부에 적히지 않는 소리. 그것뿐이에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근데 저, 노래를 마음대로 못 해요. 하려고 하면 안 나와요. 그냥…… 저도 모르게 나오는 거라서."

말하면서도 부끄러웠다. 하필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내 유일한 쓸모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니. 아카데미에서 늘 그랬다. 정작 필요할 때, 나는 늘 한 뼘씩 모자랐다.

"그럼."

애수화 씨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손끝이었지만, 힘은 다정했다. 그녀의 팔찌가 보라색 그대로 옅게 흔들렸다. 아직은, 버틸 만하다는 뜻처럼.

"마음대로 하려 하지 말아요. 그냥, 저 사람을 생각해요. 혼자 남은 저 사람을."

나는 눈을 감으려다, 감기지 않는 성안 너머로 그냥 안쪽의 리레군을 오래 바라보았다.

혼자 남은 사람. 죽지도, 쉬지도 못한 채 세상의 모든 이유를 홀로 이고 선 사람이었다.

가슴 안쪽이 저릿하게 차올랐다. 목 끝이 뜨겁게 조여 왔다. 무언가 해 주고 싶은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 마음이 목 끝까지 차오르다 못해 흘러넘쳤을 때 —

*기이잉—*

나도 모르게, 노래가 새어 나왔다.

이번 노래는, 나도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이었다.

그냥 흘러나왔다. 저 사람이 너무 오래 혼자여서. 누구 하나 곁에 없어서. 그 쓸쓸함을 견딜 수가 없어서.

노랫결이 서가를 타고 퍼졌다. 지나는 자리마다 종이 뭉치가 가늘게 파르르 떨렸다. 마치 오래 참았던 숨을, 다 같이 내쉬는 것처럼. 이곳의 어떤 도장도, 어떤 규칙도 그 소리를 붙잡지 못했다. 장부에 적히지 않는 소리였으니까. 접수되지 않으니, 완료될 수도 없었다.

전투에서 늘 꼴찌였던 힘. 아무 데도 쓸모없다고 여겼던,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이 버릇.

그것만이, 이곳에서 유일하게 지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노래가 그 마지막 한 장에 닿았다.

봉인되어 있던 이유들이, 옅은 빛 알갱이가 되어 종이 결 사이사이에서 하나씩 떠올랐다. 지워지지도, 새로 적히지도 않은 채 — 그냥, 다시 소리를 얻었다.

그 이유들이, 가느다란 금빛 실을 그리며 가능성의 리레군의 눈으로 되돌아갔다.

"…….아."

그가 처음으로, 도장을 떨어뜨렸다.

*탁그르르.*

손끝에 힘이 풀린 채, 도장이 책상 위를 굴렀다. 그 오랜 세월 쥐고 있던 것을, 그는 이제야 놓친 사람처럼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목소리가 갈라졌다.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었지."

무엇을 위해서였는지, 그조차 잊은 지 오래였다. 자기 이유마저 저 한 장에 넣어 버린 뒤로, 손은 목적도 없이 움직여 왔다.

노래가, 그의 잃어버린 이유를 그에게 되돌려 주었다.

"기억났습니까."

통신 너머에서, 현재의 리레군 씨가 물었다.

가능성의 리레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에서 금빛이 물처럼 흘렀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그 빛이, 턱 끝에서 옅게 흩어졌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기다리려고. 언젠가 누가 돌아오면, 그때 이 자리를 지킨 사람이 있었다고 말해 주려고. 그 한마디를 전하려고, 나는……."

말끝이 흩어졌다. 그 한마디를 전할 상대가, 이제 이 세계엔 없었다.

"압니다."

현재의 리레군 씨가 말을 받았다. 다정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 통신그러니 이제, 저에게 넘기십시오.

"……뭐라고."

◈ 통신당신이 이고 있는 그 한 장. 그 이유들. 제가 기억하겠습니다. 바깥에서, 지워지지 않는 곳에서.

통신선이 낮게 울렸다. 지직이며 얇게 갈라지는 그 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겨우 건너왔다. 숙 사서님이 바깥에서 붙잡고 있는, 돌아올 길이었다.

그 목소리에, 가능성의 리레군이 잠깐 숨을 멈췄다. 도장을 쥔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 통신이곳은 적으면 지웁니다. 그러나 저는 이곳이 아닙니다. 당신이 넘겨준 이유를, 제가 밖으로 가지고 나가겠습니다. 그러면 이곳도 손댈 수 없습니다.

가능성의 리레군이 오래 침묵했다. 가린 눈 아래 금빛이 잦아들었다 다시 차오르기를 반복했다.

"……그러면, 나는."

◈ 통신당신은 이제 놓아도 됩니다. 놓아도, 잊히지 않습니다. 제가 기억할 테니까요.

그 말에, 안쪽의 리레군의 어깨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너무 오래, 놓으면 전부 사라진다고 믿어 온 사람이었다. 놓아도 된다는 말을, 그는 아마 몇백 년 만에 처음 들었을 것이다.

그때, 이곳이 저항했다.

*띠링—*

「 미결 항목 이관 시도 감지 」

「 정정 · 완료 · 완료 · 완료 」

성소가 마지막 한 장을 향해, 위협을 한꺼번에 쏟아부었다. 도장 자국 네 개가 허공에 겹쳐 찍히듯 떠올라, 그 한 장까지 통째로 지워 버리려 했다.

"안 돼……!"

가능성의 리레군이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그 한 장을 지키려고. 익숙한 방식으로. 그와 마지막 한 장 사이는 겨우 두 걸음이었다. 그 짧은 거리가,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처럼 느껴졌다.

「 단 」

*서걱.*

첫 번째 위협이 갈라졌다. 손끝, 정확히는 검지 한 마디에서 색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살빛이 아니라 그 아래 있어야 할 무언가가 통째로 옅어지는, 낯선 탈색이었다.

*서걱.*

두 번째. 손등까지 색이 번졌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유리처럼 투명해지고, 그 틈으로 서가의 어두운 뒤편이 비쳐 보였다.

*서걱.*

세 번째. 손목을 지나 팔뚝까지 색이 밀려났다. 그가 숨을 짧게 삼켰다. 팔뚝 둘레로 서늘한 공기가 맴돌았다. 있어야 할 것이 빠져나간 자리마다, 온도조차 사라지고 있었다. 무형이라도 무거운 것을 끊는 일에는 큰 값이 따른다고 했다. 그는 지금, 잘라 낸 위협 하나하나에 제 존재를 한 겹씩 내주고 있었다.

"그만! 그만해요, 그러다 당신이……!"

*까득.*

내 성안도 한계였다. 오래 뜬 눈 안쪽이 새하얗게 타들어 갔다. 발밑이 아득하게 멀어지고, 서 있는지 쓰러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지지직.*

애수화 씨의 팔찌도 하얗게 다 타 버릴 듯 깜빡였다. 불꽃이 꺼지기 직전처럼,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짧은 간격으로 되풀이했다. 그녀가 되짚던 발자국이, 그 깜빡임에 맞춰 손끝에서 흐려졌다 되짚어지기를 반복했다.

우리 셋 다, 각자의 한계에 동시에 닿아 있었다. 밀어붙이던 성소는, 우리가 먼저 무너지기만 기다렸다.

"애수화 씨. 이대로면 다……."

"밀르아 대원."

애수화 씨가 나를 붙들었다. 손끝이 차가웠지만, 그 손은 떨리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기 신념을 스스로 꺾었다.

"저는 늘 남겨야 한다고 믿었어요. 남겨야 할 것은 남긴다고. 그게 제가 사는 이유였어요."

그녀의 팔찌가 하얗게 물들었다. 이번에는 깜빡이지 않고, 끝까지 타오르듯 새하얗게 굳었다.

"그런데 여기선, 남기려 들면 지워져요. 그러니 저도, 저 사람처럼 덜어낼게요. 붙잡는 대신, 나눠 들게요."

애수화 씨가 제 신성력을 마지막 한 장에 실었다.

남기는 힘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혼자 이고 있던 짐을 나눠 드는 힘이었다.

가능성의 리레군이 몇백 년 혼자 이고 있던 그 한 장을, 애수화 씨가 한쪽 귀퉁이를 받쳐 들었다. 종이의 무게가 손에서 손으로 옮겨지는 순간, 온기가 손끝을 타고 퍼졌다. 나는 멈추지 않고 노래했다. 그 노래가 통신선을 타고, 바깥의 리레군 씨에게로 흘렀다.

세 사람이, 한 사람이 오래도록 혼자 지켜 온 것을 함께 들었다.

리레군의 손끝에 남은 옅은 금색 아지랑이, 애수화 씨의 하얗게 굳은 팔찌, 그리고 내 눈 안쪽에서 흔들리는 금빛. 서로 다른 세 개의 빛이, 그 순간만은 한 방향을 향해 있었다.

*기이잉—*

노랫결이 마지막 한 장을 감쌌다. 그 안의 이유들이, 통신선을 따라 바깥으로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이곳의 장부에 적히지 않고, 완료되지 않고, 그저 현실의 리레군 씨의 기억으로 옮겨졌다.

전부는 아니었다.

몇백 년 치의 이유를, 가느다란 통신선 하나로 전부 옮길 수는 없었다. 이어받을 수 있는 만큼만 흘러갔고, 미처 따라가지 못한 것들은 흐릿한 얼룩으로 그 한 장에 남았다. 종이 위, 옅게 번진 자국들이 마르지 않은 채 그대로 눌어붙었다.

그래도 충분했다. 무게가 셋으로 나뉘자, 한 사람 몫이던 짐이 비로소 사람 셋의 무게로 줄었다. 적어도, 혼자가 아니게 되었으니까.

"……가벼워졌어."

가능성의 리레군이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색이 빠져나가던 손끝이, 더는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지 않았다.

처음으로, 손이 비어 있었다.

성소의 위협이 잦아들었다. 마지막 한 장은 완료되지 않았다. 이관도, 완료도 아닌 채 — 그저 반쯤 비워진 '미결'로 남았다.

가능성의 리레군이, 우리를 오래 바라보았다.

"이 세계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이유를 되찾아도, 멈춘 사람들은 다시 걷지 않아요. 이미 끝난 곳이니까요. 그건, 압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알아요."

나는 눈물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래도, 당신이 기억한 게 사라지지는 않아요. 저기 리레군 씨가, 바깥에서 계속 기억할 거예요. 당신이 지킨 이유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요."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웃는 얼굴을 나는 처음 봤다. 그 얼굴이, 처음 본부에서 나를 마중해 준 리레군 씨의 얼굴과 겨우 겹쳐졌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무언가가, 그 얼굴에서 처음으로 풀려 있었다.

"……그러면, 이제."

손이 가린 눈의 안대로 천천히 올라갔다. 손끝은 아직 절반쯤 색이 옅었지만, 그 움직임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상시 켜진 채, 한 번도 꺼진 적 없는 눈이었다. 끌 수도 감을 수도 없어, 몇백 년 동안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 내야 했다. 냄새도, 빛도, 죽어 가는 이들의 마지막 마음도, 전부.

그 눈꺼풀이, 아주 느리게 내려왔다. 몇백 년 만에 처음 닫히는 무게였다. 늘 뜨겁게 데워져 있던 눈 안쪽이, 처음으로 서늘하게 식어 갔다. 눈가에 맺혀 있던 금빛이 마지막으로 한 번 일렁이다, 그대로 잦아들었다.

"이제 그만 봐도, 되겠습니까."

통신 너머에서, 현재의 리레군 씨가 대답했다.

◈ 통신예. 이제 그만 보셔도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봅니다.

가능성의 리레군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 마지막 대답은, 오래 짊어진 사람이 드디어 내려놓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내쉰, 긴 안도의 한숨이었다.

*스으……*

몸이 숨을 뱉듯, 어깨부터 먼저 힘을 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지워지는 게 아니었다. 완료 처리되어 사라지는 것과는 달랐다. 그는 끝내 '완료' 도장을 자신에게 찍지 않았다. 처리되지 않은 채, 미결로 남은 채, 스스로 눈을 감고 놓여났다.

이곳은 끝내, 이 사람을 완료하지 못했다.

*사아……*

윤곽부터 빛깔부터, 그가 서 있던 자리의 공기까지 옅어졌다. 오래된 종이와 마른 먼지 냄새가 옅게 흩어지고, 그 자리에 아주 잠깐, 온기 비슷한 것이 스쳤다.

흐려지는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남았다.

"잊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말이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이번에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기억한 모두에게. 그리고, 이제 그 기억을 이어받을 바깥의 자신에게.

그가 완전히 흩어졌다. 빈 책상과, 반쯤 비워진 한 장의 보고서만 남았다.

그 보고서의 사유 칸에는, 여전히 흐릿한 얼룩이 남아 있었다. 미처 옮기지 못한 이유들. 끝내 완성되지 못한 이름.

그건 지워진 빈 칸과는 달랐다.

지워진 자리가 아니라, 언젠가 누군가 이어 쓸 수 있도록 비워 둔 자리였다.

발밑의 돌바닥이, 신기루처럼 옅어지기 시작했다.

「 미결 항목 2 · 반출 」

「 관측 종료 」

숙 사서님이 붙잡고 있던 돌아올 길이, 우리를 바깥으로 끌어당겼다. 발끝부터 감각이 서서히 옅어지는, 물속으로 가라앉듯 낯선 부유감이었다.

멀어지는 기록성소를, 나는 성안이 꺼지기 직전까지 바라보았다.

코끝에 닿던 마른 먼지 냄새가, 조금씩 다른 냄새로 옅어져 갔다. 낯익은, 오래된 가죽과 종이 냄새였다.

이유를 잃고 끌려가던 사념들이, 이제는 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갈 곳이 없어도 좋다는 듯, 조용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아주 옅은 온기가 감돌았다. 누군가 오래 지켜 준 자리에만 남는, 그런 온기였다.

노래가, 아직 내 목 끝에서 옅게 떨리고 있었다.

멈추려 해도 멈춰지지 않던 그 소리가, 이번만큼은 조금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