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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01 / 10

도망치겠느냐

# 1화 — 도망치겠느냐

창이 공허의 목을 갈랐다.

「 아니마 리베라티스 」

소리는 없었다. 세상의 모든 비명을 한곳에 모아 짓이긴 다음, 그 위에 침묵을 두껍게 덮은 것 같은 무엇이 있을 뿐이었다. 아니마 리베라티스의 창날이 어둠의 식도를 따라 미끄러지자—벨 것이 없는 무저항의 이물감이 손목에서 어깨로 거슬러 올랐다—그 안에 갇혀 있던 영혼들이 풀려났다. 수백, 수천. 삼켜진 자들의 이름이 한꺼번에 빛으로 돌아오는 광경을, 엑타르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올려다보았다.

위대한 임무가 끝났다.

석판의 약속대로였다. 가장 먼저 어둠 속을 걷는 자,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자, 알려지지 않은 악몽에게 승리를 쟁취하는 자. 그는 그 모든 문구를 단 한 번의 일격에 완수했다. 그리고 약속의 나머지 절반이, 이제 그의 몸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산화(散華).

손끝부터였다. 갑주의 합금이 빛의 가루로 풀려 위로 떠올랐다. 통증은 없었다. 다만 가벼워졌다. 평생 그를 짓눌러 온 무게가 이제야 어깨에서 한 겹씩 벗겨지는 것처럼. 죽음으로서, 의무가 끝나리라. 그는 그 문장을 취임식에서 맹세했고, 매일 새벽 되새겼고, 지금 그대로 살아내는 중이었다.

창이 비명 같은 공명음을 냈다.

*끼이이이이이—!*

그 소리와 함께, 엑타르는 다시 그 성벽 위에 서 있었다. 현실이 아니었다. 창이 보여주는 기억의 안쪽—여기서만은, 오직 여기서만은 그의 절제가 풀린다. 하얀 날개의 천사가 절망한 병사들 사이를 낮은 자세로 걸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천사는 승리를 약속하지 않았다. 생존도 약속하지 않았다. 자신도 두렵노라고, 이 벽을 버리고 도망치고 싶노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도망칠 권리를, 명령이 아니라 선물처럼 손에 쥐여주었다.

성벽의 한 사내가 흐느끼며 앞으로 나섰다. 세쿤두스. 그는 죽은 행상인 칼런 벡스터의 이름을 도용해 전장을 빠져나가려 했던 자신을 고백했다. 동료들은 분노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천사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도망치겠느냐?"*

엑타르의 뺨을 따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기억 공명 안에서만 허락된, 그가 평생 현실에서는 보인 적 없는 것. 그는 옛 병사들과 함께 답했다.

*"……아닙니다."*

도망치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답이었다. 늘 그래왔다. 그 한 마디가 그를 분과장으로 만들었고, 선봉으로 만들었고, 마지막 진군의 맨 앞에 세웠다.

기억이 걷히고, 빛이 그의 가슴까지 올라왔다. 하얀 깃털 무리가 내리고 있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그것을 보고 소멸한 동료의 안식을 빌 것이다. 의무는, 죽음으로서 끝난다.

그가 눈을 감으려는 순간—

하늘이 지워졌다.

깃털이 아니었다. 깃털이 *사라지고* 있었다. 빛도, 구름도, 그 너머의 푸른 것까지.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거두어졌다. 그가 방금 해방한 영혼들이 다시 한번, 이번에는 빛조차 남기지 못하고 꺼졌다. 풀려난 이름들이, 풀려난 순서대로 도로 지워졌다.

아우스레인.

공허의 목을 베어도 공허 그 자체는 베이지 않는다는 것을, 엑타르는 그 순간 처음으로 이해했다. 그가 죽인 것은 한 마리의 짐승이었을 뿐, 짐승을 풀어놓은 그것은 베이지 않았다. 세계의 기원이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 그것은 싸우지 않았다. 그저 *지웠다.*

그리고 지움은, 가장 먼 기록부터 닿았다.

세계가 지워지는 순서대로, 이름들이 흐려졌다.

엑타르는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가장 먼저 사라지는 다섯—그가 평생 기억하려 했으나 끝내 얼굴을 잃어버린 다섯의 이름을.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뒤를 이어 다른 이름들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함께 싸운 자들. 같은 식탁에서 그가 빚은 포도주를 마시던 자들. 형제라 부르고 자매라 불렀던 자들. 분과의—

*그들마저.*

처음으로, 엑타르의 절제가 산화의 한복판에서 깨졌다.

"이건—이건 아니다."

그는 평생 분노를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것은 그 어느 것으로도 눌리지 않았다. 그가 지킨 것이, 그의 무덤 위에서 한 글자도 남김없이 지워지고 있었다.

창이 다시 비명을 질렀다. 아니, 비명이 아니었다. 성벽 위의 천사가 물었던 그 질문이, 이번에는 기억의 안쪽이 아니라 그를 *향해* 똑바로 겨눠졌다.

*도망치겠느냐?*

평생, 그 물음에 그는 한 가지로만 답해왔다. 남겠습니다. 죽음으로서 끝나겠습니다. 그 답은 고결했고—실패했다.

죽음은 아무것도 끝내지 못했다. 그는 죽었고, 세계는 그래도 지워졌다. 산화는 곧 자기 자신을 지우는 일이었고, 지움을 먹고 사는 것에게 그것은 한 끼에 지나지 않았다. 도망치지 않은 자의 충성은, 도망칠 곳조차 남기지 않은 적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처음으로, 엑타르는 세 번째 답을 떠올렸다.

남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아니었다. 산화하여 지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되돌아가서, 다시 쓰는 것.*

"……아니. 이번엔 다르게 묻겠습니다."

그가 창을 향해, 처음으로 거꾸로 물었다. 네가 나를 끝낼 수 없다면, 나를 시작으로 돌려보내라. 영혼을 해방하는 창이라면, 갇힌 것을 풀어주는 창이라면—이 끝에 갇힌 나를, 풀어라.

영혼을 해방해야 할 창이, 정작 그의 영혼만은 해방하지 않았다. 대신 창은 그를 움켜쥐었다. 흩어지던 빛을, 지워지던 한 사람의 의식을, 마지막 한 조각까지 그러모아 어딘가로 *되던졌다.*

세계가 백지로 꺼졌다.

*툭.*

그리고—

향냄새가 났다.

유향나무 진액. 양초의 밀랍. 그 아래 깔린 오래된 돌과, 더 아래 어딘가에서 익어가는 포도의 산도. 의식의 성소에서만 나는 냄새였다. 엑타르가 평생 가장 많은 새벽을 보낸 공간의 냄새.

그는 눈을 떴다.

천장이 있었다. 빛의 성역, 의식의 성소 안쪽 골방의 낮은 천장. 지워지지 않은 천장. 위로 떠오르지 않는, 빛의 가루로 풀리지 않는, *그냥 천장*이었다. 돌의 결이 보였다. 오래된 균열도, 그가 늘 보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엑타르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손끝이 온전했다. 갑주의 합금이 풀려나가던 그 손끝이. 그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폈다. 통증 대신 감각이 있었다. 살아 있는 자의 감각이.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일정하게, 무겁게, 살아 있는 박동으로. 환각은 심장을 이렇게 정직하게 뛰게 하지 않는다.

그는 한 가지 잠정 결론에 도달했다. *이것은 현실이다.* 그리고 현실이라면, 다음 질문은 하나뿐이었다. 언제인가.

문이 두드려졌다.

*쿵, 쿵, 쿵.*

세 번. 짧게, 사이를 두지 않고. 두드리는 자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두드리는 동시에 이미 문을 밀고 있다.

엑타르의 호흡이 멎었다.

그는 그 노크를 알았다. 손등으로 세 번, 망설임 없이. 분과의 다른 누구도 이렇게 두드리지 않는다.

문이 열렸다. 후드를 반쯤 내린 사내가, 묻지도 않고 골방 안으로 들어섰다. 건조한 눈, 깎아낸 듯한 윤곽. 분과장에게도 경어를 쓰지 않는, 녹턴에서 유일하게 그러는 자.

하인리티스. 루인.

엑타르가 기억하는 어느 새벽, 라흐 왕성 장서관의 무너진 천장 아래에서 끌어낸 차가운 무게. 너무 늦게 도착했던 그 새벽의, 식어 있던 손.

그자가, 살아서, 문턱에 서 있었다.

"분과장."

하인리티스가 단조롭게 말했다.

"장서관 건. 엘리시온이 또 혼자 다 떠안으려 한다. 막든지 말든지, 정해."

엑타르는 대답하지 못했다.

산 자의 목소리였다. 식어 있던 손이 아니라, 문틀에 무심히 기댄 어깨였다. 그가 그토록 늦게 도착했던 그 새벽이, 아직 오지 않은 새벽이었다.

"……분과장?"

"……"

"안 일어날 거면, 혼자 간다."

하인리티스가 돌아서려 했다. 늘 그랬다. 계획을 세우는 자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들어가는 자.

"기다리십시오."

엑타르의 목소리가 자신의 귀에 낯설게 들렸다. 낮고, 건조하고, 절제된. 다만 그 안에서 무언가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그는 스스로 눌렀다. 숨을 골랐다. 한 번. 헛기침. 통제를 되찾는 그의 방식.

"형제. 오늘이… 며칠입니까."

하인리티스가 미간을 좁혔다.

"……취했나. 분과장답지 않게."

"날짜를."

"성회력 그 달 열하루. 새벽."

엑타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발이 차가운 돌에 닿았다. 진짜 돌이었다.

성회력 열하루의 새벽.

그는 이 날짜를 알았다. 평생 잊지 못한 날짜 중 하나였다. 모든 비극이 시작된 첫 페이지. 그는 머릿속에서 헤아렸다. 그가 겪어 온 일들의 순서를. 그 기억은 또렷했다. 선지의 안개가 아니라, 직접 겪은 자의 기억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은 채로 돌아왔는지도 알았다.

다섯의 얼굴. 그가 평생 기억하려 했던 성전군 전우 다섯. 산화의 마지막 순간, 그 지움이 가장 먼저 거둬간 것. 돌아온 지금도,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이름의 그림자만 손에 쥐여 있을 뿐, 얼굴은 백지였다.

그런데 백지가 아닌 것이, 하나 남아 있었다.

한 사람은 칼을 갈 때마다 음정이 어긋난 성가를 흥얼거렸다. 늘 같은 소절에서 틀렸고, 틀린 자리를 알면서도 끝내 고치지 않았다. 엑타르는 그 어긋난 음을 아직 기억했다. 누구의 목소리였는지는 잊은 채로, 그 음 하나만.

그것이 가장 잔인했다. 지움은 그를 알아보게 하는 모든 것을 가져가고, 알아볼 수 없는 부스러기만 남겨 두었다. 얼굴 없는 노래. 이름 없는 버릇. 그러쥘수록, 손은 더 비어 갔다.

지움은, 그가 시작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를 따라왔다.

엑타르는 그 사실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끝에서 그를 본 그것이, 그를 통째로 놓아준 것이 아니었다. 한 조각을 떼어 물고 돌려보낸 것이었다. 그가 무언가를 바꿀 때마다, 그것은 또 한 조각을 청구할 것이다.

알면서도,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번엔, 다르게 쓴다.

엑타르는 벽걸이의 창을 보았다. 카에룰루스 플람메. 푸른 화염의 랜스. 그가 기억하기로, 마지막에 든 것은 이 창이 아니었다—볼트 XVI의 성유물, 총대장이 직접 수여하는, *아직 그가 받지 않은* 창. 받지 않았다는 것은, 그 사이의 모든 죽음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일어나지 않은 죽음은, 막을 수 있는 죽음이었다.

그는 창을 내려 쥐었다. 이마에 대고, 아주 낮게 읊조렸다.

"……라이미라크를 위하여."

일어섰을 때,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 그러나 전투 모드로 진입한 것이 표면에서도 읽혔다. 하인리티스조차 반사적으로 반보 물러섰다.

"분과장. 장서관 건은 오늘 밤이라며. 아직 한참—"

"오늘 밤이 아닙니다."

엑타르가 말했다.

"지금부터입니다."

그가 골방을 나섰다. 처음으로, 그는 미래를 *알고* 걸었다. 어둠 속을 가장 먼저 걷는 자였으나, 이번만은 그 어둠의 지도를 손에 쥐고 있었다.

지도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그는 알았다. 모든 것을 지우는 부재. 그가 산화하고도 막지 못한 종착지.

그러나 종착지를 안다는 것은, 거기에 닿기 전에 길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늘 밤, 그 천장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정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