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1 / 04
서장 — 먼저 열린 문
푸른 문이 먼저 열렸다.
허공에 띄운 마지막 술식 선에, 대서고 수석 사서 숙의 손끝이 닿기도 전이었다.
소리는 없었다. 봉인선이 풀리며 우는 낮은 공명도, 굳게 닫힌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도 없었다. 그저 문 앞의 옅게 쌓인 먼지 위로 서늘한 푸른빛이 먼저 번져 나갔을 뿐이다. 빛은 안에서 새어 나온 것이 아니라, 문 앞의 공기가 통째로 차갑게 식어 내리는 감각에 가까웠다.
금서고 앞 복도는 원래부터 조용한 곳이었다.
하지만 조용함에도 결이 있다. 방금 전까지의 조용함은 종이와 잉크가 잠든 서고의 것이었다. 멀리서 사서의 발소리가 울리고, 서가 어딘가에서 책장이 한 장 넘어간다. 마력등 유리가 은은한 온기를 뿜으며 낮게 웅웅댄다. 살아 있는 건물의 조용함이었다.
그 소리들은 하나씩 죽어 갔다.
마력등의 웅웅거림이 유리 안쪽에서 잦아들고 발소리가 끊겼다. 끝내는 제 숨소리마저 어딘가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지금의 조용함은 다른 종류였다. 숨을 죽인 무언가가 문 저편에서 이쪽을 마주 보고 있을 때에만 감도는, 그런 고요였다.
두 걸음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츄니티의 손이 반사적으로 허리춤을 향해 움직였다.
익숙한 수첩 표지의 결이 손끝에 닿았다. 결이 닳아 반들거리는 가죽의 온기. 종이 모서리가 손가락 안쪽을 살짝 긁었다.
지금이 적기 좋은 순간이었다.
문틈까지의 거리 여섯 걸음. 광량과 개문 각도, 빛이 먼지 위로 번지는 속도. 눈에 들어온 것들이 습관처럼 숫자로 갈라지고 다음 숨의 좌표까지 계산이 끝나 있었다. 그런데도 계산 끝에 남은 결론은 오직 하나였다.
지금 당장은, 적지 않는다.
"……방금 건, 제가 수첩에 남기면 안 되는 쪽이겠죠."
숙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몇 겹의 정중한 우회를 거쳐야 돌아왔을 대답인데, 오늘은 곧장 나왔다.
"적지 않는 일도 기록입니다."
츄니티는 결국 수첩에서 손을 뗐다.
빈 손끝이 자꾸만 가죽 표지 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엄지로 손바닥 안쪽을 꾹 눌렀다. 이 수첩에는 동료들의 하루하루가 담겨 있다.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손은 늘 표지 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닫는 쪽이 맞았다.

금서고는 직전 정기 회기까지 온전한 장소였다. 물리 봉인과 마력 결계 모두 '이상 없음'으로 결재가 떨어진 곳. 그 결재 서류의 잉크가 마른 지, 아직 얼마 되지도 않았다.
노아가 안경을 검지로 천천히 밀어 올렸다.
렌즈 테를 따라 새겨진 가는 술식이 서고 조명을 받아 잠깐 빛났다. 그는 문을 보고 문틀을 보고 문 앞의 먼지를 본 뒤, 한 호흡 늦게 입을 열었다. 가장 많이 보고 가장 늦게 판단하는 사람의 속도였다.
"직전 회기 기록과 다릅니다."
"어느 쪽이 다른데요?"
"단 한 곳입니다."
노아의 손끝이 문틀 아래쪽, 흠집 하나 없이 매끈한 지점을 가리켰다.
"미허가 접근은 없습니다. 봉인 술식의 마모도 없습니다. 결계의 매듭도 회기 당시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문은 열렸습니다."
방금 전까지 정상이라 판정받았던 문이 사람의 결정보다 먼저 입을 벌린 셈이었다.
"원인 없는 개문이라니, 헤드라인으로 뽑기엔 영 별로네요."
츄니티가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방어적인 농담이라도 걸치지 않으면 이 낯선 공기에 짓눌릴 것 같았다.
"사서님. 도로 닫는 게 먼저 아닌가요?"
"닫을 수는 있습니다."
숙의 손끝은 그때까지도 허공에 멈춰 있었다.
"다만…… 무엇이 먼저 열렸는지 모른 채, 다시 눈을 가리는 꼴이 되겠지요."
돌아온 말은 짧았다.
츄니티는 그 짧음마저 계산에 넣었다. 이 사람의 말은 위험이 커질수록 겹이 한 장씩 벗겨진다. 지금 남은 말은 뼈대에 가까웠다.
"그럼, 관측이 먼저네요."
"그렇게 판단합니다."
종이 냄새가 왈칵 짙어졌다가 사람의 온기에 밀려났다.
열람석 구역이었다. 서가 사이의 서늘한 공기 대신 가죽과 기름, 훈련장의 모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오래된 목재 좌석들이 낮게 신음하듯 삐걱였다. 대서고가 이렇게 붐비는 광경을, 츄니티는 손에 꼽을 만큼밖에 세어 본 적이 없었다.
총대장의 소집령. 전원.
헤븐워커. 세계의 경계 안팎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다룬 일의 대부분을 세상에 알리지 않는 조직. 그 일을 분과들이 나눠 진다. 기록하는 자들, 막는 자들, 숨어드는 자들, 치우는 자들, 그리고 가장 먼저 나서는 자들.
훈련복 소매에서 마른 모래가 *사륵* 떨어지는 레퀴엠 분과가 먼저 와 있었다.
"자, 자. 줄 맞춰서. 훈련장 아니라고 대충 앉기 없기."
하세운이 손뼉을 두 번 치며 분과원들을 몰았다. 은발이 어깨 위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소집령이 내려온 마당에도 그 목소리에는 아침 훈련장의 온도가 남아 있었다.
"멈머이. 옆에 앉아."
이리스가 손바닥으로 제 옆 좌석을 두드렸다. 돈친삼이 군말 없이 가서 앉았다.
"안냐루. 근데 이리스, 나 멈머이 아니라니까."
투덜거림은 돈친삼의 것이었다. 멈머이는 이리스가 붙인 부름이었고, 정정은 한 번도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다.
"됐어, 알아. 아무튼 앉아."
도펄은 그 옆자리에 등을 묻듯 조용히 내려앉아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배고파."
"끝나고 먹자. 오늘 식당에 새 메뉴 들어왔대."
하세운이 도펄의 헝클어진 머리를 지나가듯 한 번 쓸었다.
"쏘 굿."
엄지까지 세워 보이는 분과장을 보며 쟌디가 목을 빼고 열람석 대열을 훑었다.
"열람석이 이렇게 꽉 차는 건 처음 보오. 심판의 문 앞보다 붐비오."
방패 문양 견장의 아이기스가 그 뒤 열에 자리를 잡았다. 시로냐가 옆자리 밀르아의 어깨에 스친 제 사슬 자락을 거두며 짧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무엇에 대한 감사인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고, 밀르아만 눈을 두 번쯤 깜박이다가 얼떨결에 대답했다.
"에-…… 넷! 아니에요!"
서가 그늘 쪽에는 낮은 그림자 몇이, 마른 먼지 냄새 속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 그늘 속에, 하인리티스가 있었다.
츄니티의 계산이 잠깐 멈췄다.
저 사람이 지금 본부에 있다. 보고 제출도, 분과장 호출도 아닌 이유로. 상시 파견자가 열람석에 앉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츄니티는 이 소집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었다.
엑타르가 그 곁을 지나며 고개를 한 번 숙였다.
"와 주셨군요, 형제."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니라, 그늘이 조금 더 깊어지는 침묵이었다. 엑타르는 그 침묵을 대답으로 받아들이고 제자리에 섰다.
파견복 차림 그대로 온 엘리시온이 목깃을 여몄다. 옷깃에서 푸른 액세서리가 잘게 흔들렸다.
"우리는… 이 냄새가 오랜만입니다."
노래하듯 느릿한 말이었다.
아콘의 두 사람은 열람석 끝에 있었다. 애수화는 무릎 위에 서류 꾸러미를 얹은 채였고 손목의 팔찌가 짙은 보랏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 옆자리, 리레군.
츄니티는 그를 볼 때마다 시선이 한 번씩 왼쪽에서 멈춰 섰다.
결이 다 닳은 천 하나가 왼눈을 가렸다. 가려지지 않은 오른눈만으로 그는 서가와 문과 사람들을 훑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 그의 어깨가 열람석 모서리를 살짝 스쳤다. 본인은 익숙한 듯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서류가 아니라 현장이라 다행입니다."
리레군이 낮게 말했다. 애수화가 두툼한 서류 꾸러미 위에 손을 얹으며 답했다.
"복귀하시면 이 두 배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예, 알겠습니다."
록커킴이 열람석 사이를 지나가며 무언가를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룬이 새겨진 작은 호신부였다. 손바닥으로 짚듯 놓고 다음 자리로. 올려다봐야 하는 덩치가 지나갈 때마다 낡은 목재 다리가 그 무게에 눌려 낮게 삐걱였다.
"가져가."
그것이 전부였다.
효리가 제 몫의 호신부를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매끄러운 룬 표면이 손끝에 닿았다. 신참의 손가락이 조금 굳어 있었다.
"괜찮아요!"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말하고 효리는 스태프를 고쳐 쥐었다. 밝은 목소리였다. 밝아서 오히려 긴장이 보였다.
"오~ 신참, 그거 좋은 거야~ 나도 하나 받았거든."
라이라가 제 호신부를 손끝에 걸어 보이며 웃었다. 룬 새김이 옅게 반짝였다. 그 곁에서 리엘아르가 열람석 대열 전체를 천천히 눈에 담았다. 무언가를 세는 눈이 아니라, 무게를 재는 눈이었다.
"…다들, 준비되신 것 같아요."
서고 문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열린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였다.
유라가 들어왔다. *저벅.* 먼 길을 걸어온 사람의 흙먼지가 외투 자락에 남아 있었다.
"마지막 대원까지 왔군요."
숙이 말했다.
"음."
유라는 그 한 마디로 인사를 끝내고 빈 열람석에 앉았다.
참관석은 열람석 대열에서 반 층 비켜난, 나무 냄새 옅은 자리에 있었다.
도즈는 거기 있었다. 차갑게 식은 총기 표면을 검지로 가볍게 쓸며.
*툭, 툭.*
서두르지 않는 박자였다. 그가 시선을 두는 곳마다 소음이 한 겹씩 줄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열람석의 웅성임이 가라앉은 것은 소집 시각 때문이 아니라, 그 박자가 만든 정적 때문인지도 몰랐다.
셰윌라는 보고서 묶음을 안은 채 참관석 앞을 지나쳤다. 시선이 반 발 비껴갔다. 츄니티는 그것도 계산에 넣었지만 결론은 내리지 않았다. 결론이 나지 않는 항목도 있는 법이다.
빈 열람석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 어둠의 성소를 지키는 이의 자리만은 처음부터 대열에 없었다.
"성소는 자리를 지킵니다."
숙이 짧게 말했다.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규칙을 고지하겠습니다."
숙이 금서고 문 앞으로 돌아섰다. 구두 굽 소리 하나에, 열람석의 낮은 웅성임이 완전히 가라앉았다.
"전술 재현 장치 ARES에, 가능성의 길을 탐색하는 패스파인더를 연동합니다. 지금부터 여는 것은 정사 기록이 아니라 — 있었을지도 모르는 세계의, 심층 재현입니다."
그의 손끝이 허공에서 무언가를 가만히 넘겼다. 대원들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손동작의 정확함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실재한다는 사실만은 정확하게 전했다.
"접속은 대서고 열람석 경유로만 엽니다. 통증 차단은 제가 겁니다 — 통각이 걸러져도 손상은 남습니다. 몸이 가볍다고 무사한 것이 아닙니다."
숙의 시선이 열람석 전체를 한 바퀴 훑었다.
"문 안쪽 세계에 같은 사람이 있으면, 바깥의 본인은 몸으로 진입할 수 없습니다. 오직 통신으로만 연결됩니다."
"위험 지표가 한계를 넘으면요?"
츄니티가 물었다.
"제가 오류를 격리합니다. 그리고."
숙이 참관석 쪽으로 반 걸음쯤 물러섰다.
"차단 명령은, 총대장께 있습니다."
도즈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총기 위의 검지가 멈췄다.
"잘라내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잘려 나갑니다."
숙이 덧붙였다. 경고인지 보고인지 구분되지 않는 어조였다. 차단은 구조가 아니라 절단이며, 안에 든 것을 통째로 잃는 길이라는 뜻이었다. 열람석 어딘가에서 누군가 마른침을 삼켰다.
"……좋습니다."
도즈는 그렇게만 답하고 앞에 놓인 결재 서류에 무언가를 적었다.
펜촉 끝이 종이를 누르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한 줄. 서명. 종이 넘어가는 마른 소리.
츄니티는 그 소리마저 적지 않았다. 적을 항목이 아니었다. 아직은.
열람석 책등의 옅게 닳은 금박이 빛나고 문틀 안쪽의 푸른 결이 한 줄씩 정밀하게 재배열되었다. 시야 끝에 짧은 문장이 스쳤다.
「 접근 권한 확인 」
글자는 서고 업무처럼 짧고 사무적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이 문장 하나가 지금 어떤 문을 상대하고 있는지, 글자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관측을 먼저 넣어 보겠습니다."
셰윌라가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손끝에서 빛이 떨어져 나왔다. 유백색에 옅은 하늘빛이 감도는, 나비 한 마리. 날개가 접혔다 펴질 때마다 공기 중에 가는 빛가루가 남았다.
나비는 문턱을 넘었다.
이내 날갯짓이 느려졌다. 문턱 안쪽의 공기가 더 무거운 것처럼 나비를 눌렀다.
날개의 결이 먼저 무너졌다. 유백색 빛이 안쪽에서 잘게 일그러지더니, 나비의 형태가 종이 접히듯 꺾여 들어갔다. 숨 두어 번 사이, 유리처럼 매끈했던 빛가루조차 흔적 없이 지워졌다.
셰윌라의 손이 허공에서 잠시 멈춰 있었다. 방금까지 제 빛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는 손이었다.
"…"
그녀는 손에 익은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적었다. 문에 대해서가 아니라, 문 앞의 먼지 결에 대해서 적는 것처럼 보였다. 핵심이 아니라 주변을. 그녀의 수첩은 늘 그런 식이었다.
"…안쪽이, 관측을 돌려보내지 않아요."
"관측이 아니라 접속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숙이 말했다.
"저 문이 삼킨 것은 바깥에서 던져 넣은 눈입니다. 시스템이 정식으로 놓는 접속선은, 저쪽이 먼저 열어 둔 길을 따라갑니다."
들어가 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곳. 그리고 이미, 사람의 결정보다 먼저 열려 버린 곳.
츄니티는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위험을 알리는 계산은 이미 끝나 있는데 물러선다는 선택지만 계산표에 없었다.
문이 열렸다. 원인은 안쪽에 있다. 관측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관측 수단은 이제 하나뿐이다.
사람이 들어간다.
「 심층 재현 승인 대기 」
'대기'라는 글자는 단 한 호흡조차 버티지 못했다.
푸른 잡음이 글자 가장자리를 갉아먹었다. 문장이 통째로 부서지고, 다른 문장이 그 자리에 떠올랐다.
「 가능성 분기 응답 」
"방금 전까지 대기였잖아요."
"그렇습니다."
숙의 대답은 빠르고 날카롭게 돌아왔다.
"그럼 저쪽에서 먼저 응답한 거네요."
푸른 문 안쪽의 빛이 바닥돌을 타고 기어 내려왔다. 문턱을 넘지는 않았다. 그런데 열람석 아래로 뻗은 그림자들이 일제히 한 뼘씩 뒤로 밀려났다.
응답은 하나가 아니었다.
낡은 종이 냄새가 훅 끼쳤다. 문틈의 푸른빛 위로 서류 한 장의 잔상이 겹쳐졌다. 이름은 남아 있는데 그 이름을 적어야 했던 이유만 하얗게 지워진 보고서.
아무도 앉지 않은 푸른 읽는 자리 하나가 스르륵 뒤로 밀려나는 기척도 겹쳤다.
사람 없는 거리의 흰빛이 아주 멀리서 한 번 깜박였다. 상점 문은 닫혀 있고 의자는 반듯하게 들어가 있는데 사람만 없는 거리.
세 잔상은 눈 한 번 깜박이는 사이에 전부 접혀 들어갔다.
그리고 남은 것이 있었다.
선명한 녹색 선 하나가, 물감 번지듯이 아니라 훈련장 바닥에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곧게, 바닥을 타고 뻗어 나왔다.
선은 열람석 사이를 지났다.
이리스의 부츠 옆을 지나고 도펄의 그림자를 가로질러.
한 사람의 발치에서, 멈췄다.
돈친삼.
레퀴엠의 선봉. 그녀는 그저 열람석에 앉아 대기 중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오른손이, 녹색 선이 닿기도 전에 이미 허리춤을 더듬고 있었다. 가죽 활집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는 손. 이 서고 안에 활집은 없었다.
"……어?"
짧은 소리가 새어 나오다 끊겼다. 몸이 먼저 알고, 머리가 뒤늦게 따라잡는 사람의 소리였다.
츄니티는 그 색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레퀴엠. 전투가 벌어지면 가장 먼저 나서는 자들의 색.
"레퀴엠 쪽입니다."
숙의 목소리가 낮고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돈친삼은 제 발치의 녹색 선을 내려다보았다. 선은 더 나아가지 않았다. 문 저편의 무언가가 열람석 사이를 전부 지나쳐, 정확히 이 자리 하나를 골라 냈다는 뜻이었다.
"……나한테 멈췄네."
"네. 그것도 적지 않을게요."
츄니티가 말했다. 농담처럼 들리라고 한 말인데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
하세운이 열람석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제 선봉의 발치에 멈춘 녹색 선을 보는 분과장의 눈이, 아주 짧게 좁아졌다.
"돈친삼. 발 움직이지 마."
전장의 목소리였다. 형용사가 전부 떨어져 나간, 이름과 동사만 남은 문장.
녹색 선은 그 목소리에 반응하듯 한 번 옅게 일렁이다 바닥에 가라앉았다.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기다리는 쪽에 가까웠다.
접속 승인이 열람석을 훑기 시작했다.
빛은 자리마다 차례로 내려앉았다. 훈련복의 모래알이 승인 인장의 온기 아래에서 잘게 반짝이고 방패 문양 견장 위로 빛이 미끄러졌다. 서가 그늘의 낮은 그림자들 위에도 빛이 앉았다. 그늘은 그대로 둔 채, 인장만 빛을 받았다. 잉크 얼룩이 남은 소매들 위에, 서류 꾸러미를 무릎에 얹은 자리 위에.
하나. 또 하나.
어디선가 콧노래가 반 소절 새어 나왔다.
아주 작아서, 부르는 본인도 부르는 줄 모르는 것 같은 소리였다.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다만 그 소절이 지나간 자리의 숨소리가 아주 조금, 고르게 가라앉았다.
하세운은 제 자리의 인장보다 분과원들의 것을 먼저 확인하고 있었다. 도펄. 이리스. 쟌디. 효리. 돈친삼. 다섯 자리가 차례로 밝아지는 것을 지켜보고서야, 그녀는 제 팔걸이로 시선을 내렸다.
열아홉 자리가 밝아졌다.
츄니티는 세었다. 세는 것이 일이니까.
그리고 계산이 어긋난 지점에서, 시선이 멈췄다.
한 자리가 어두웠다.

사람은 있었다. 열람석에 앉아, 팔걸이에 손을 얹고 승인을 기다리는 자세 그대로. 다만 그 자리의 인장만이 켜지지 않았다.
하세운의 좌석이었다.
레퀴엠 분과장은 제 팔걸이의 꺼진 인장을 내려다보았다.
매끈하게 닳은 목재 팔걸이 위에서, 방금 전까지 도펄의 머리를 쓸어 주던 손이 아주 천천히 오므라들었다.
"어라."
처음에는 그렇게만 말했다. 아직 아침 훈련장의 온도가 반쯤 남은 목소리로.
"내 자리만, 왜."
「 동일 서명 감지 — 접속 보류 」
서고 업무 톤의 짧은 문구가 그녀의 시야 위에 푸르게 떠서, 사라지지 않았다.
같은 사람이 안팎에 겹치면, 바깥의 본인은 들어갈 수 없다.
방금 고지된 규칙이었다. 규칙 자체는 이해하기 쉬웠다.
이해한 순간이, 문제였다.
열람석의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돈친삼의 손이 활집 없는 허리춤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유라가 고개를 들었다. 노아의 안경 렌즈 위로 푸른 조명이 비스듬히 걸렸다. 도즈의 검지가 총기 표면 위에서 멈춘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하세운의 얼굴에서, 밝음이 먼저 꺼졌다.
웃음기가 걷히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침 훈련장의 온도가 걷히고 그 아래에 있던 것이 드러났다. 전장에서만 꺼내는 얼굴. 대원들이 쓰러지는 순간에만 보이는 얼굴.
그녀는 아주 천천히, 꺼진 인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안쪽에, 내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