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2 / 04
중장 — 최후의 빛
헤븐워커 본부는 소리부터 죽어 있었다.
문을 건너왔을 때, 돈친삼의 발밑에는 대서고 열람석의 부드러운 가죽이 없었다. 본부 중앙 홀의 차가운 돌바닥이 발바닥을 단단히 받쳐 들 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곳은 하루 종일 시끄러워야 했다. 보고서를 들고 뛰는 베리타스, 방패를 맞부딪는 아이기스, 그림자처럼 스치는 녹턴, 훈련복에 모래를 묻힌 레퀴엠이 서로 어깨를 치고 지나가며 욕과 웃음을 섞는 곳.
지금은 그 모든 소리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였다.
천장의 마력등은 절반 넘게 꺼져 있었고 남은 빛마저 바닥에 닿기 전에 푸르게 식어 내렸다. 갇혀 있던 공기가 오래 묵은 먼지 냄새를 눅눅하게 뿜어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그 냄새가 목 안쪽에 뭉근하게 눌어붙었다. 발밑 돌바닥에도 먼지막이 켜켜이 앉아, 디딜 때마다 뽀득한 마찰음이 났다. 벽에 걸린 분과 표식들은 제자리에 있었지만 가장자리부터 하얗게 벗겨져 있었다. 레퀴엠 표식 아래 흩어진 모래만이 이상할 만큼 새것처럼 서걱거렸다.

돈친삼은 제 발소리가 텅 빈 홀 저편까지 메마르게 굴러갔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것을 들었다.
무섭다는 생각보다 먼저, 몸이 낮아져 있었다. 무릎이 반쯤 굽고 무게중심이 앞발에 실려 있었다. 생각은 그다음에 왔다.
여기, 우리 집인데.
우리 집은, 이런 소리를 내는 곳이 아닌데.
◈ 통신듣고 있어.
고막 안쪽으로 얇은 잡음이 섞여 들었다. 하세운의 목소리였다. 접속을 거부당한 몸은 대서고 열람석 곁에 남았고 목소리만 접속선을 타고 이쪽까지 닿아 있었다. 바로 귓가에 있는 목소리인데, 몸은 없었다.
◈ 통신다들 주변부터 확인해. 서두르지 말고.
◈ 통신접속선은 붙잡고 있습니다.
숙의 목소리가 그 뒤에 겹쳤다. 두 사람 다, 이 죽은 홀 어디에도 없었다.
돈친삼은 어금니를 물었다.
서장, 아니 대서고에서의 그 순간이 아직도 등허리에 뻐근하게 눌어붙어 있었다. 꺼진 인장. 밝음이 걷히던 분과장의 얼굴. 안쪽에, 내가 있어.
그러니까 이 죽은 세계 어딘가에, 하세운이 있다.
찾으러 간다. 그거면 됐다. 복잡한 건 언제나 그다음이었다.
"리레군."
돈친삼이 부르기도 전에, 그는 이미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손을 대고 있었다.
리레군의 오른손이 제 왼눈의 눈가림에 닿았다. 천 자락이 반쯤 걷혔다.
가려져 있던 눈이 드러났다. 금빛. 어둑한 홀 안에서 그 눈만이 다른 온도로 빛났다.
드러낸 순간부터, 그의 관자놀이에 가느다란 핏줄이 팽팽하게 섰다. 닫을 수 없는 문을 여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잔류가, 눌어붙어 있습니다."
낮은 목소리가 돌바닥 위를 굴렀다.
"마력이 아니라 — 감정 쪽에, 가깝습니다."
◈ 통신……저 녹색.
통신 너머에서 하세운이 숨을 삼켰다.
◈ 통신내 생명의 에너지야. 사람한테 닿고 사라져야 할 회복이…… 장소에 남아 있어.
바닥 먼지 아래에서 옅은 녹색 빛이 한 번 튀어 올랐다. 리레군의 금빛 눈이 그 빛의 결을 좇았다.
"살린 자국이 아닙니다. 같은 명령을, 계속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돈친삼은 그 말을 절반쯤만 이해했다. 나머지 절반은 몸이 이해했다. 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분과 복도로 들어서자 공기가 가파르게 좁아졌다.
벽의 안내 표식은 절반쯤 뜯겨 나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아이기스 쪽 복도에는 방패가 버틴 자리마다 둥글게 파인 흠집이 남아 있었고 녹턴 쪽 모퉁이에는 빛이 끝까지 닿지 못한 짙은 그림자가 짙게 고여 있었다. 베리타스 표식 아래 찢어진 기록지에는 글자가 남아 있었지만 무엇을 증명하려던 문서인지는 이미 하얗게 지워져 있었다.
밀르아가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눈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푸른 눈동자 위로 금색이 번지는 순간, 밀르아의 어깨가 아주 작게 떨렸다.
"……이 세계에는, 사념이 없어요."
"없다니?"
"소리도, 기억도, 원념도…… 아무것도 없어요. 전부 기록만, 반복되고 있어요."
밀르아의 목소리 끝이 흐려졌다. 금빛으로 물든 성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 사념 없는 세계란 소리 없는 세계와 같았다.
유라가 복도 바닥에 한쪽 무릎을 조용히 꿇고 손끝으로 녹색 흔적의 결을 가만히 짚어 내렸다.
"흔적이 여러 갈래인데, 끊기지 않습니다. 전부 레퀴엠 쪽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대로 손끝을 털어내지 않은 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음."
그 확인음 하나로, 대열의 방향이 정해졌다.
하인리티스는 그 대열에 없었다.
방향이 정해지기도 전에, 그는 이미 복도 그늘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어 사라졌고 모두가 첫 모퉁이에 닿기도 전에 소리 없이 돌아와 있었다.
"막다른 길 없음. 매복 없음."
보고는 그게 전부였다. 본부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내가 몸소 앞장을 서 준다는 것, 그 사실 하나가 이 원정의 무게를 새삼 증언하고 있었다.
복도 끝에서 모래 냄새가 났다.
레퀴엠 훈련 구역이었다.
익숙해야만 하는 장소였다. 모래 냄새, 낡은 과녁, 옆 훈련장에서 넘어왔어야 할 거친 욕설, 고개만 들면 마땅히 보여야 할 종루까지, 전부 돈친삼이 잘 아는 것들이어야 했다.
욕설이 없었다.
검이 모래를 긁는 서걱임도 없었다.
훈련이 끝났다고 누군가 대자로 드러눕는 소리도, 없었다.
고개를 잔뜩 들어 올려도, 종루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훈련장 자체가, 종루가 있어야 할 자리까지 아직 온전히 열리지 않은 것 같았다.
쟌디가 모래 위에 손끝을 댔다. 짧은 빛이 튀었다가 가라앉았다.
"바로 들어가면 안 되오."
"왜?"
"같은 자리를 밟아도, 조금씩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오."
효리가 훈련장 입구에 서서, 모래밭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시선이 한 곳에 멈추고 분홍빛 눈동자가 아주 희미하게 흔들렸다. 다음 호흡의 자리를 읽어내는 눈. 그 눈이 서서히 커졌다.
"……여긴, 미래가 한 가지뿐이에요."
"무슨 뜻이야?"
"모래가 어디로 갈지 읽으면…… 전부 '제자리'로만 돌아가요. 다른 가능성이, 하나도 없어요."
돈친삼은 그 말의 무게를 훈련장 안쪽에서 확인했다.
대원들은 천천히 발을 디뎠다.
한 걸음. 모래가 발밑에서 푹 꺼졌다가, 곧장 원래 모양으로 복구된다.
두 걸음. 낡은 과녁 하나가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중심이 시원스럽게 뚫려 있는데도 구멍 안쪽으로는 바람 한 줄기 불지 않았다.
세 걸음.
훈련장 중앙, 낮은 푸른 안개 아래.
바닥에 녹색 빛자국 세 개가 박혀 있었다.

누가 그려 놓은 표식처럼 반듯하지 않았다. 같은 자리를 너무 오래, 억지로 붙잡은 빛이 모래 속까지 진득하게 배어든 자국이었다.
첫 번째 빛자국은 훈련장 중앙의 모래 아래에서 숨 가쁘게 뛰고 있었다. 쓰러지려는 무언가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는 박동.
두 번째 빛자국은 바깥으로 이어져야 할 길목을 둥글게 가로막고 있었다.
세 번째 빛자국은 종루가 있어야 할 방향의 발치에서, 위를 향해 유독 거칠게 타올랐다. 무언가를 단단히 움켜쥔 손처럼.
시로냐의 회백색 눈이 세 빛자국의 윤곽을 하나하나 차례로 훑었다. 그 시선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마다, 보이지 않는 선이 겹겹이 그어지는 것 같았다.
"구조를 봤습니다."
시로냐가 말했다.
"셋 다, 가장 얇은 결이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 건드리면 서로를 당깁니다."
푸른 홀로그램 문자가 시야 한가운데 얇게 켜졌다.
「 레퀴엠 훈련장 」
문자는 종루에도 바닥에도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노이즈가 한 번 튀었다.
*지직.*
「 꺼져버린 빛을 틔우기 위한 발버둥 」
"발버둥……?"
도펄이 눈썹을 찌푸렸다. 돈친삼도 그 글자를 읽었다. 읽고도,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보다 먼저 몸이 반응할 일들이, 곧 시작될 것 같아서.
리레군이 세 빛자국 중 가장 옅어 보이는 가장자리 앞에 무릎을 굽혔다.
"쓸데없는 게 너무 많습니다."
그의 오른손이 올라갔다. 손끝에 희미한 금색 아지랑이가 피었다.
"적당히 덜어내 보죠."
손날이 아래로 내려갔다. 빛자국에 닿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금빛 눈이 크게 열려 있었다. 아지랑이가 손끝에서 잘게 떨리다가, 흩어졌다.
"……."
"리레군?"
"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손을 슬며시 거두고 아주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눈가림을 다시 반쯤 내려 덮으며.
"옅어 보이는 건 겉면뿐입니다. 이건 흔적이 아니라 — 붙잡고 있는, 마음입니다."
돈친삼은 그 말을 이해하는 데 이번에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흔적을 지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못 지우는 것이 아니라, 지워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노아가 허공에 기록용 글자를 띄웠다. 세 빛자국 근처에서, 글자의 아래획이 흔들리더니 먼지 속에 눌린 빛을 따라 짧게 휘었다.
"세 지점이 독립적으로 버티는 게 아닙니다. 하나를 건드리면, 나머지가 한 방향으로 당겨집니다."
"어느 방향으로요?"
유라가 손끝으로 안개 너머, 훈련장 중앙을 가리켰다.
"저기."
안개가 걷혔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커튼이 저절로 걷히듯 열렸다.
중앙에, 하세운이 서 있었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온몸을 덮은 마른 피와, 꺼지지 않는 녹색 빛 때문에. 다음 순간, 어긋난 것들이 하나씩 눈에 걸리기 시작했다.
은발이 허리까지 길게 흘러내려 있었다. 전투 때 대충 묶고 뛰던 길이와는 완전히 달랐다. 중간중간 칼로 거칠게 끊어낸 듯한 삐뚤빼뚤한 단차가 보였다.
눈높이가 달랐다. 분명히, 더 높았다.
낡은 레퀴엠 전투복은 어깨와 손목에서 훌쩍 짧아져 있었다. 옷자락 아래로 드러난 팔목은 유독 길고 앙상하게 메말라 있었다. 소매 끝이 해진 채 너덜거렸다.
오른손 안쪽에는 무언가 부러진 손잡이를 너무 오래 움켜쥔 굳은살. 왼쪽 손목에는 가는 현이 파고들었다 아문 상처가 겹겹이 말라붙어 있었다.
겉모습만 놓고 보면 얼굴은 같았다.
하지만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은 전혀 달랐다.
푸른 홀로그램 빛이 그녀의 길어진 머리채와 어깨선을 천천히 훑고 지나, 짧아진 소매와 마른 피가 눌어붙은 손등까지 읽어낸 뒤 돈친삼의 시야 한가운데 차갑게 박혀 들었다.
「 빛의 선두자 - 하세운 」
문자는 채 숨 한 번을 버티지 못하고 으스러졌다. 푸른 잡음이 글자 안쪽을 야금야금 갉아먹었고 하얀 검열 칸이 그 자리를 대신 메웠다.
「 빛의 ■■자 - 하세운 」
*지직.*
「 최후의 빛 - 하세운 」
그것은 이름표가 아니라, 부고에 가까웠다.

본래 빛의 선두자는 앞에 서는 것만으로 주변을 밝히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정반대였다. 남은 빛이 전부 그녀에게만 질척하게 매달린 채, 다른 모든 것을 어둠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녹색 빛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데도, 훈련장 중앙만 유난히 어두웠다.
통신이 갈라졌다.
◈ 통신……아니야.
현실의 하세운. 의자가 밀리는 잡음이 함께 넘어왔다.
◈ 통신머리, 저렇게 길지 않아. 그리고…… 나보다, 커.
'너무 오래 버텼다'는 말로는 모자란 사람이었다.
실제로, 홀로, 수많은 시간을 건너온 사람이었다.
중앙의 하세운이 고개를 들었다.
초점이 흐린 눈동자가 대원들을 한 사람씩 붙잡았다. 적을 확인하는 시선은 아니었다. 너무나 보고 싶었지만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스스로 굳게 다잡았던 얼굴들을, 하나씩 세어보는 시선이었다.
"도펄."
도펄의 어깨가 굳었다.
"이리스. 쟌디."
이름이 하나씩 불릴 때마다 그녀의 목소리는 바싹 메말라 갔다.
"……효리."
효리가 숨을 멈췄다.
신참이었다. 레퀴엠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런데 이 세계의 하세운은 그 이름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 멸망 속에도 효리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잃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들…… 왜 아직 여기 있어."
부자연스럽게 웃으려다, 실패한 얼굴.
돈친삼은 활을 든 채로 겨우 입을 열었다.
"세운."
하세운의 얼굴이 그 이름 앞에서 처절하게 무너졌다.
"그렇게 부르지 마."
거절이 아니었다. 애원에 가까운 비명이었다.
"부르면…… 내가 또, 늦은 것 같잖아."
그녀의 입술이 조금씩,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생명의 직감 」
"도펄, 팔 빼."
현재의 도펄이 움직이기도 전에, 훈련장 가장자리에서 도펄의 뒷모습을 한 잔영이 먼저 튀어나왔다.
이 훈련장이 오래 기억해 온 레퀴엠, 마지막 전투의 어느 한 순간에 그대로 박제된 잔영이었다.
*파직!*
청백색 방전이 모래를 타고 낮게 튀어 올랐다. 현재의 도펄이 몸을 급히 비틀었지만 잔영의 방전이 그보다 빨랐다. 소매가 찢기고 오른팔 안쪽이 얕게 갈라졌다.
잔영은, 하나가 아니었다.
이리스의 잔영이 대검을 어깨 위로 무겁게 끌어올렸고 쟌디의 잔영이 하얀 잔광을 그리며 모래 위를 미끄러져 갔다. 백은빛 깃털의 궤적, 효리의 잔영이 그 사이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그 틈새로, 윤곽조차 제대로 읽히지 않는 자리들이 뒤섞여 있었다.
얼굴은 푸른 노이즈에 먹혀 부슬부슬 흩어지고 있었다. 이름도 뜨지 않았다. 옷의 선도, 무기의 형태도 없었다. 오직 공격의 궤적만이 소름 끼치게 선명했다.
「 ■■■ 」
아직 이쪽이 만나지 못한, 레퀴엠의 미래.
하세운이 앞으로도 잃을까 봐 죽도록 두려워하는 이들이었다.
돈친삼의 몸이 낮아졌다. 생각보다 먼저.
*서걱.*
방금 전까지 머리가 있던 높이에서 공기가 잘려 나갔다.
같은 습관은, 필연적으로 같은 빈틈을 만든다.
현재의 이리스가 제 잔영의 대검을 흘려내며 이를 드러냈다. 검이 오는 각도는 눈보다 손이 먼저 알아챘다. 제 검이었으니까. 그런데 잔영도 이리스가 어디로 흘릴지 미리 알고 있었다. 흘려낸 검끝이 반 치나 꺾이며 손목을 다시 노리고 되돌아왔다.
*쩌엉!*
이리스가 검을 정면으로 단단히 받아냈다. 손목이 아래로 확 꺾이고 팔꿈치가 밀리고 뒤꿈치가 모래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이 자식, 나잖아! 얄미운 것까지 나야!"
쟌디는 제 잔영과 잔광을 겹쳤다. 흰 빛줄기 둘이 모래 위에서 서로 교차하고 갈라지고 또 교차했다. 현재의 쟌디가 반 호흡 늦게 궤도를 꺾을 때마다 잔영은 벌써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내 발을 못 따라잡아……!"
잔영과 짝을 이루지 않은 이들 역시, 나란히 그 자리를 버티고 있었다.
리레군의 방패가 후열로 새는 방전을 받아냈고 베리타스의 눈들이 잔영의 다음 궤적을 쉬지 않고 짚어냈다. 오래 맞춰 온 합이었다. 그 합으로도,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돈친삼은 습관처럼 입을 열려 했다.
다들 괜찮지 —
말이 목구멍에서 턱 걸렸다.
저쪽에도 도펄이 있었다. 이리스가 있었고 쟌디가 있었고 효리도 있었다. 부르면 어느 쪽이 대답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저쪽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게 더 무서웠다.
그 당연한 말을, 돈친삼은 처음으로 삼켰다.
효리는 물러선 자리에서 잔영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고 분홍빛 눈이 가늘게 흔들렸다. 읽는 눈. 읽어낸 것을 스스로 믿지 못하는 눈.
"……이미 아는 박자예요."
"뭐가?"
"다음 수요. 읽으면…… 거의, 어긋나질 않아요. 미래가 아니라 — 기억을, 반복하고 있어요."
살아 있는 것의 다음은 늘 갈래로 읽혔다. 이 잔영들에게는 갈래가 없었다. 한 번 있었던 일이, 정해진 순서대로 다시 있을 뿐이었다.
효리의 시선이 중앙으로 옮겨 갔다. 타락한 하세운에게.
그 눈이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저분에게는……."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다음'이, 없어요."
읽을 것이 아예 없었다. 끝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다음 호흡이 없다. 지금이, 영원히 지금일 뿐이었다.
밀르아가 금안으로 같은 곳을 응시하며, 낮게 목소리를 얹었다.
"잔영들에게는 사념이 없어요. 기록뿐이에요. 그런데……."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저 안쪽만…… 사람으로, 보여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무도 되묻지 않았다.
전장의 소음 속에서, 돈친삼은 문득 보았다. 잔영들의 발이 일제히 같은 박자로 모래를 짓누르는데 유독 쟌디만 한 호흡 어긋나 있었다. 본인도 모르는 눈치였다. 잘 버티네. 그렇게만 여기고 시선을 거뒀다.
합이 쌓이자, 처음으로 이쪽이 앞섰다.
이리스가 잔영의 대검을 정면에서 거세게 밀어붙였다. 같은 검이라면 힘도 같다. 힘이 같다면, 먼저 무너지는 것은 각도를 바꿀 줄 모르는 쪽이다. 세 합째에 이리스가 검면을 비틀어 흘렸고 잔영의 중심이 반 치나 기울어졌다.
"돈친삼!"
부름보다 화살이 빨랐다. 기울어진 중심의 무릎 뒤를 화살이 꿰뚫었고 이리스의 대검이 그대로 어깨선을 갈랐다.
잔영이 모래 위에 무너졌다. 노이즈가 가루처럼 부서져 흩날렸다. 짧은 정적.
"하나!"
이리스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어 보였다. 싸울 만하다. 훈련장의 모두가 같은 생각을, 반 호흡쯤 품었다.
그 반 호흡이 끝나기 전에.
쓰러뜨린 잔영이, 다시 일어섰다.
이리스가 꺾어 놓은 손목이 꺾이기 전으로 돌아갔다. 도펄이 걷어낸 방전의 각도가 처음부터 다시 그어졌다.
시간이 통째로 '쓰러지기 직전'이라는 순간으로 되감기며 찢어진 곳을 다시 말끔히 지우고 있었다.

도펄이, 멈췄다.
잔영의 가시가 도펄의 팔뚝을 스쳤다. 배어 나온 피가 미지근하게 번지며 살갗을 타고 흘렀다. 그런데 다음 순간, 방금 그 일격이 통째로 지워졌다.
도펄의 얼굴에서 표정이 빠져나갔다.
베여서가 아니었다.
배어 나온 피는 그대로인데, 베였다는 기록만 사라져서였다.
도펄에게 전장은 피부가 받아 적어 주는 지도였다. 어디서 살기가 날아와 어디에 꽂히는지가 그대로 새겨졌다. 방금 팔뚝에 꽂힌 한 획이, 그 지도 위에서만 없던 일이 되어 있었다.
"……방금, 맞은 다음이 아니라."
도펄이 아주 나직하게 말했다.
"맞기 전으로, 돌아갔잖아."
◈ 통신도펄! 팔 직접 움직여 봐!
통신이 급박하게 열렸다. 현실의 하세운이었다.
◈ 통신기록이 지워졌다고 손상까지 사라진 게 아니야!
도펄이 천천히 손가락을 폈다. 세 번째 손가락만, 반 호흡 늦게 따라왔다.
중앙의 하세운이 왼손을 옆구리로 가져갔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현을 튕길 리라 루미도, 손가락에 걸릴 금빛 줄도.
그런데 소리가 났다.
*기이잉―*
공기가 현처럼 떨렸다. 모래 알갱이들이 낮은 음계에 맞춰 떠올랐다가, 같은 높이에서 일제히 떨어졌다.
「 Harmonia Animarum 」
통신 너머에서 의자가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 통신……잠깐. 루미가, 없잖아.
현실의 하세운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무너졌다.
◈ 통신그건 루미가 뒤에서 맞춰 주는 선율이야. 나는, 루미 없이 저 선율을 낸 적이 없어!

선율이 전장을 덮었다. 잔영들의 발이 한꺼번에 같은 박자로 모래를 짓눌렀다. 현재 대원들의 심장까지, 그 박자에 끌려 들어가려 했다.
◈ 통신귀 막지 마 — 몸이 먼저 따라가! 발을 서로 다른 박자로 움직여!
원드 세이가 없는 오른손이, 허공을 내리쳤다.
「 Animo Surge 」
*두근!*

중앙의 녹색 빛자국이 미친 듯이 박동했다. 꺾이려던 잔영의 무릎이 강제로 펴졌다. 지워져 가던 미래의 빈자리들이 다시 선명한 윤곽을 드러냈다.
본래는 계속 싸울 이유를 살리는 축복이었다.
여기서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포기하려는 마음에서 '포기할 자유'만을 도려낼 뿐이었다.

◈ 통신아니야. 저건 내가 아는 회복이 아니야.
현실의 하세운의 목소리가, 경고와 비명 사이 어딘가에서 갈라졌다.
◈ 통신생명의 에너지는 상처를 닫는 힘이지, 시간을 되감는 힘이 아니야! 녹색 빛이 몸에 감기면 서로 이름을 불러 — 아픔이 사라졌는데 움직임이 늦어지면, 이미 붙잡힌 거야!
거대한 녹색 파동이 돈친삼이 서 있던 자리를 향해 밀려들었다.
완벽한 구조의 힘이 그대로 밀려들었다. 닿으면 다치는 것이 아니라, 치유되어 이 전장에 다시 일으켜 세워진다.
생각보다 다리가 앞섰다. 그 앞을, 흰 방패가 가로막았다.
*콰앙!*
리레군의 방패, 미라였다. 방패라기보다 둔기처럼, 파동의 옆구리를 후려치듯 받아넘겼다. 방패 밑단이 모래를 두 뼘이나 밀며 미끄러졌고 그의 어깨가 크게 젖혀졌다. 방패 표면에는 미세한 진동이 한참 동안 잔물결처럼 남았다.
"물러서십시오."
낮게 깔리고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목소리가 방패 너머에서 들려왔다.
파동이 갈라져 지나간 자리의 모래가, 상처 하나 없이, 소름 끼치도록 멀쩡하고 곱디곱게 다져져 있었다.
돈친삼은 튀어 나갔다.
몸이 먼저였다. 왼발이 모래를 강하게 디뎠고 밟힌 자리가 사륵사륵 제자리로 돌아가려 꿈틀거렸다. 발목에 힘을 쥐었다.
시위에 화살을 힘주어 건 채로,
멈췄다.
한 호흡.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가 손끝을 밀어냈고, 오래된 활대의 나뭇결이 손바닥에 배겼다. 아주 오래전, 누군가 지켜보던 시선의 감각. 시위를 당기기 전에 반드시 오는, 그 1초의 정적.
「 궤도의 종결 」
*퉁!*
중앙을 향한 첫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화살은 중앙의 녹색 못, 세 빛자국 가운데 심장처럼 뛰는 그것의 가장 얇아 보이는 가장자리를 노렸다.
닿았다.
화살촉이 비스듬히 미끄러져 나갔다.
촉이 파고들지 못하고 옆으로 흘렀다. 쇳소리 섞인 진동이 활대를 타고 손목까지 지잉 울려 올라와, 손가락 두 개를 저리게 만들었다.
빛자국은 갈라지는 대신 물결처럼 뒤로 크게 밀려났다. 하세운의 손끝이 까딱이자 처음부터 밀린 적 없다는 듯 되감겼다.
틈이, 없었다.
"……그럼, 저분을 쓰러뜨리면 끝납니까."
리레군이 방패 너머에서 물었다. 질문의 형태를 한, 확인이었다.
노아의 기록용 글자가 짧게 깜박였다. 그는 이번에도 한 호흡 늦게, 그러나 정확하게 답했다.
"아니요. 방금 흔들린 것은 저분의 몸이 아니라, 바닥의 세 빛자국입니다."
"하나를 건드리면 나머지가 저 손끝으로 당겨집니다."
유라가 받았다.
"사람을 쓰러뜨리는 싸움이 아닙니다. 중앙, 길목, 종. 셋을 — 차례로, 놓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리스가 중앙을 노려보았다.
처형대의 눈이었다. 전투 중에 결코 멈추지 않는 사람이, 유일하게 멈추는 순간.
정적.
반 호흡. 한 호흡.
숨을 들이켜는 소리조차 사라진 그 정지 속에서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리스의 단검 끝이, 천천히 내려갔다.
"……."
"이리스?"
"안 열려."
그녀는 제 손바닥을 한 번 가만히 내려다보고 다시 하세운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호탕함이 걷힌 얼굴에 낯선 표정이 남아 있었다.
"……죽일 이름이, 아니야."
"그럼?"
돈친삼이 물었다. 이리스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불러야 할 이름이지."
하세운의 손이 다시 올라갔다.
그 손끝을 따라, 오래된 명령들이 겹겹이 층을 이루며 흘러나왔다. 낮게, 쉬지 않고, 기도문처럼.
'왼쪽.'
'뒤.'
'엎드려.'
'숨 쉬어.'
'아직.'
'아직.'
'아직.'
기도처럼 시작했던 선의의 말이 너무 오래 반복되면, 어느 순간 형벌이 된다. 그녀는 그 벌을, 제 목에 스스로 걸고 있었다.
돈친삼은 시위에 다음 화살을 걸었다. 손가락이 저렸다. 저린 채로 걸었다.
그때, 하세운이 처음으로 대원들 전체를 향해 말했다.
목소리가 쩍쩍 갈라져 있었다.
"끝났다고 하지 마."
훈련장 전체가, 얼어붙었다.
"그 말 다음에…… 전부, 사라졌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 훈련장의 모든 잔영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노이즈에 먹힌 얼굴들까지.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