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4 / 04
후일담 — 아파서 다행이야
모래 냄새가 걷혔다.
대신 오래된 종이와 마력 잉크의 냄새가, 아주 천천히 코끝으로 올라왔다. 서가 사이에 오래 고여 있던, 조용하고 아늑한 공기.
대서고였다.
돈친삼은 접속 좌석의 팔걸이를 붙잡은 채, 한동안 손가락을 펴지 못했다.
손에 활은 없었다. 그런데도 시위가 걸려 있어야 할 손가락이 허공을 더듬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훈련장의 모래가 남아 있는 것 같은, 까끌까끌한 감각이 맴돌았다.
뒤늦게, 주변의 소리가 돌아왔다.
묵직한 방패가 *쿵*, 바닥에 내려앉는 소리. 사슬이 절렁이며 감기는 소리. 총구가 조심스럽게 아래를 향하는 소리. 여기저기서 참았던 숨이 길게 빠져나가는 소리.
살아 있는 건물의 소리였다.
참관석 쪽에서, 숙이 손끝으로 제 코끝을 눌렀다. 붉은 기운이 배어 나오기 직전의 자리를,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허공에서 무언가를 닫는 그의 손동작이, 평소보다 반 호흡 느렸다.
이번만큼은 하세운도 같은 공간에 서 있었다.
접속하지 못한 좌석 곁에, 처음부터 끝까지 서 있던 자리 그대로.
"……아파."
도펄이 제 오른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찢긴 소매 아래, 잔영의 가시가 스쳤던 자리가 뒤늦게 뜨끔뜨끔 욱신거리는 모양이었다. 접속이 끝나고, 걸러졌던 통각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하세운이 그 말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다친 대원을 볼 때의 얼굴이 아니었다. 안도하는 얼굴이었다.
"응. 아파서, 참 다행이야."
"……아프다니까?"
"모든 상황이 온전히 끝난 뒤에 남은, 정직한 아픔이니까."

도펄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제 손가락을 하나씩 굽혔다 폈다. 세 번째 손가락이 반 호흡 늦게 따라오자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배고파."
이번에는 누구도 그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능력을 태운 몸이 보내는, 살아 있다는 보고였으니까.
하세운의 손이 제 허리춤으로 내려갔다.
루미. 흰금빛 리라가 거기 있었다. 손끝이 현에 닿기 직전 멈추더니, 이번에는 손목 쪽으로 다급하게 내려갔다. 세이. 금빛 원드도, 거기 있었다.
둘 다 실재했다.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고도, 하세운은 한 번 더 만졌다. 또 한 번. 현은 그때마다 손끝을 얕게 밀어냈다. 줄은 아직 팽팽했다.
"루미가 없으면, Harmonia Animarum은 그렇게 잔인한 형태로 남지 않아."
혼잣말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세이가 없으면 Animo Surge도…… 그렇게, 뛰어서는 안 되고."
스스로에게 되짚는 확인이었다. 무기를 잃지 않은 손이, 방금 전 무기를 전부 잃은 미래를 만지고 온 사람처럼 떨리고 있었다.
서가 사이의 긴 탁자 위로, 빛의 점들이 떠올랐다.
셰윌라가 손끝을 움직일 때마다 점이 하나씩 늘었다. 먼저 열린 문. 대기에서 응답으로 뒤집힌 글자. 세 번 바뀐 칭호. 비어 있던 두 손. 하얀 검열의 빈칸.
점들은 서로 이어지지 않은 채, 허공에 흩어져 있었다.
셰윌라는 그것들을 하나씩, 직접 선으로 이었다.
"칭호가 세 번 바뀌었어요. 처음부터 최후였던 게 아니라 — 선두자에서, 최후까지, 순서대로 떨어진 거예요."
노아가 안경을 밀어 올렸다.
"가운데 이름은 끝까지 열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허공의 하얀 빈칸을 바라보았다.
"지워졌기 때문에,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숙이 참관석에서 내려와, 그 구조도 곁에 섰다.
"대기가 응답으로 뒤집힌 것도, 순서에 넣어야겠지요."
그의 목소리에는 겹이 다시 한 겹씩 돌아와 있었다.
"우리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 시스템이 먼저, 말을 걸어온 셈입니다."
셰윌라의 손이 마지막 점 앞에서 멈췄다.
이유가 지워진 보고서. 사람 없는 거리. 존재했던 것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째로 비어 버린 세계.
"…이 가능성의 멸망은."
그녀는 그 점을 잇지 않았다.
"존재가, 지워지는 방식과 닮았어요."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선을 긋지 않은 점 하나가, 구조도 가장자리에서 조용히 빛났다.
대신 그녀는 첫 번째 점으로 돌아갔다. 먼저 열린 문.
"이건, 가설이지만요."
셰윌라가 문 쪽을 돌아보았다. 지금은 닫혀 있는, 푸른 금서고의 문을.
"저 문이 먼저 열린 게 아니라…… 먼저 살리려는 손이, 닿았던 건지도 몰라요."
돈친삼은 그 말을 이해했다.
위험 직전의 빈자리를 누구보다 먼저 읽고 누구보다 먼저 움직이던 사람. 그 습관이 세계의 경계 앞에서도 그대로였다면 — 문은 열린 것이 아니라, 열어 준 것이다. 한 호흡 먼저. 늘 그랬듯이.
하세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허리춤의 루미를, 한 번 더 만졌다.
애수화가 결재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접속 전후의 기록들이 그녀의 손끝에서 각을 맞춰 갔다. 종이 넘어가는 마른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돈친삼은 그 곁을 지나치다가, 넘겨지는 서류 한 장에 시선이 걸렸다.
접속 유지 연장, 승인.
결재란의 서명은 접속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말라 있었다.
돈친삼은 걸음을 멈췄다.
한계입니다, 라고 숙이 말했던 순간. 오지 않던 차단. 그 몇 호흡의 침묵은 망설임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기다릴 작정으로 넓혀 둔 자리였다.
참관석의 도즈와 눈이 마주쳤다.
"그것이 당신들의 판단이었습니까."
낮고 평평한 목소리였다. 끝내는 대신 끝까지 가 보겠다는 판단. 잘라내는 대신 종을 울리겠다는 판단.
"응."
돈친삼은 반말로 대답했다. 늘 그랬으니까. 그러고는 덧붙였다.
"끝내도 되는 전투였어. 끝내야 되는 전투가 아니라."
끝내야 해서 끝낸 것이 아니라, 끝내도 될 때까지 싸웠다는 말이었다. 도즈는 잠시 그 대답을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그 한 마디로, 무언가가 결재되었다.
리레군이 앞으로 나선 것은 그때였다.
사후처리관. 헤븐워커의 행보에 남은 흔적을 지우는 것이 직무인 사람. 오늘 같은 날이면 가장 바빠야 할 사람이 서류 더미를 두고 도즈 앞에 섰다.
"이 기록은, 지우지 않습니다."
낮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였다.
애수화의 손이 서류 위에서 잠깐 멈췄다. 지우는 것이 일인 사람이, 남기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잊지 않았습니다."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돈친삼은 묻지 않아도 알았다. 이 세계의 누구도 만난 적 없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했던 한 사람의, 너무 오래 서 있던 등을 향한 말이었다.
"남기십시오."
도즈가 답했다.
종이 넘기는 소리 사이로 다른 소리가 끼어들었다.
*사각.*
츄니티였다.
참관석 곁, 도즈의 시야가 닿는 자리에서, 그녀의 수첩이 펼쳐져 있었다. 늘 닫혀 있던 표지가. 늘 닫는 쪽을 택하던 손이, 지금은 적고 있었다.
*사각. 사각.*
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이 한동안 이어졌다. 츄니티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이번 건, 적어도 되는 쪽이라서요."
노아가 그 곁을 지나다가 걸음을 늦췄다. 허공의 기록용 글자와, 종이 위의 펜촉. 같은 하루를 적는 서로 다른 두 기록이었다.
"공식 기록에는 전부 남습니다."
"알아요."
펜은 멈추지 않았다.
"이건 전부 말고, 잊으면 안 되는 것만요."
문 앞에서 닫았던 수첩이었다. 적기 좋은 순간에 적지 않는 것이 기록이라던 날의. 그렇다면 오늘의 이것은 적어야 비로소 끝나는 종류의 기록이었다.
"예고편이든 뭐든 좋으니까…… 일단 밥부터 먹고 하자."
도펄이 힘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하세운이 웃었다. 아침 훈련장의 온도가, 조금씩 얼굴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래. 다들 밥 먹고 하자. 새 메뉴, 아직 안 늦었을 거야."
열람석 사이로 낮은 웃음이 번졌다. 방패가 등판에 *턱* 얹히고 사슬이 차르륵 감기고 서류가 꾸러미로 묶였다.
사슬을 갈무리하던 시로냐가 밀르아 쪽으로 반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무엇에 대한 감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밀르아는 이번에는 눈을 깜박이지 않고, 마주 고개를 숙였다.
"……네! 저도요!"
파견복 목깃을 여미던 엘리시온이, 문을 나서기 전에 한 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다음에 올 때도…… 이 냄새였으면 좋겠습니다."
모래와 가죽과 기름 냄새. 살아 있는 본부의 냄새였다.
그 소란 속에서, 효리가 숨을 골랐다.
스태프를 쥔 손은 아직 조금 떨리고 있었다. 제 잔영을 본 손이었다. 이 멸망에도 저는 있었고 잃어버린 이름들 속에 저도 있었다.
"괜찮아요."
효리가 말했다.
돈친삼이 돌아보았다. 신참의 얼굴에는 늘 덮개처럼 쓰던 밝음 대신 다른 것이 있었다.
"이번에는, 진짜예요."
돈친삼은 웃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늘 하던 말이 나왔다. 훈련장에서, 전장에서, 끝나고 나면 반드시 하던 말. 저 죽은 세계에서는 끝내 목에 걸려 나오지 못했던 말.
"응. 다들, 괜찮지?"
"괜찮아요!"
"배고파."
"괜찮소."
"오~ 나야 뭐, 괜찮지~"
"음."
대답이, 사방에서 돌아왔다.
돈친삼은 그 대답들을 하나도 세지 않았다. 셀 필요가 없었다. 전부, 들렸으니까.
식당으로 몰려가는 소란을 등지고 돈친삼의 발이 멈췄다.
이유는 몰랐다. 몸이 먼저였고, 이번에도 생각은 그다음이었다.
손끝에 아직 시위의 압력이 남아 있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잔영들의 침묵이, 종소리의 여운 밑에 가라앉아 있었다. 씻겨 나가지 않은 것들이, 어딘가 눌어붙어 있었다.
발은 아래로 향했다.
허가를 구해 내려가는 걸음이 아니었다. 불려 내려가는 걸음이었다. 부르는 쪽이 계단 아래의 어둠이라는 것만은, 생각보다 먼저 알 수 있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가 살갗에 서늘하게 감겼다. 소란은 멀어졌다. 마력등의 간격이 뜸해지고 마지막 등불 너머부터는 — 어둠이 벽 대신 서 있었다.
어둠의 성소.
문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깊은 어둑함의 문턱 앞에서 돈친삼은 멈춰 섰다.
안쪽에, 흔들의자가 있었다.
흔들의자에, 그녀가 있었다. *삐걱.* 의자가 그녀를 태운 채 낮게 흔들렸다.
비체는 놀라지 않았다. 이 시간에 이 계단을 내려온 발소리가 처음이 아닌 기색이었다. 아니, 발소리가 내려오기도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들어오시기 전에, 한 가지만."
낮고 오래된 목소리였다.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나가시면 기억나지 않을 겁니다."
돈친삼은 문턱 앞에 선 채, 그 말을 곱씹었다.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 말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겠지.
"……응. 들어갈래."
어둠은 차갑지 않았다. 두껍고 부드러운 것이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할 수 없다. 말해질 수 없는 종류의 시간이 지나갔다.
다만 나서는 등 뒤로, 목소리 하나가 조용히 닿았다.
"이 어둠이, 당신만의 빛을 담아낼 수 있기를."
계단을 다 올라왔을 때, 돈친삼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나 방금, 어디 갔다 왔지?"
기억이 없었다. 식당으로 가다가, 어딘가에 들렀다가…… 아니, 들르긴 했던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몸이었다.
숨이 가벼웠다.
손끝을 펴 보았다. 시위의 압력이 사라져 있었다. 접속 좌석에서부터 손가락에 눌어붙어 떨어지지 않던 그 팽팽함까지 자취를 감췄다.
찢겨 나갔던 자리가 제멋대로 아물어 버린 것 같은, 낯선 이질감. 그런데 그 이질감이, 싫지 않았다.
멀리서 식당의 소란이 들려왔다. 그릇 부딪는 달그락 소리. 도펄이 뭔가를 두 그릇째 시키는 소리. 이리스가 웃는 소리. 누군가의 콧노래.
부르면, 온전히 대답해 주는 사람들.
돈친삼은 씩 웃고 달리기 시작했다.
"일단 내가 먼저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