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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03 / 04

종장 — 끝내도 되는 전투

돌아본 잔영들이, 일제히 바닥을 박찼다.

첫 물결이 대열에 닿기 직전, 유라가 모래에 손끝을 박았다. 쓰러진 잔영에게로 되돌아가려는 녹색 빛의 경로를, 맨손으로 눌러 막았다.

"순서가 필요합니다."

유라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손톱 밑에 푸르스름한 흔적이 짙게 배어 있었다.

"먼저 중앙을 늦춰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쓰러진 잔영이 끝없이 되감깁니다."

"출구가 두 번째입니다."

노아의 기록용 글자가 세 빛자국 사이에 얇은 화살표를 그렸다가 지웠다.

"길이 닫힌 채로 종을 먼저 치면, 끝났다는 말을 저 손이 힘으로 막아섭니다. 중앙을 늦추고, 출구를 살리고 — 마지막이, 종입니다."

시로냐의 회백색 눈이 세 빛자국을 다시 훑었다. 이번에는 윤곽이 아니라 결을 따라서였다. 시선이 멎는 자리마다, 끊어 낼 지점이 하나씩 새겨졌다.

"가장 얇은 결을 짚어 드리겠습니다. 중앙은 뿌리 쪽. 길목은 바깥 테두리. 종은 — 매듭의 위가 아니라, 아래입니다."

숙의 통신이 들어왔다. 평소라면 겹겹이 둘렀을 우회가, 한 겹씩 벗겨진 문장으로 도착했다.

◈ 통신오류 지표가 올라갑니다.

다른 목소리가 이어졌다.

◈ 통신계속할 이유를 보이십시오.

도즈였다. 단 한 번. 그것뿐이었다. 차단 명령권을 쥔 사람의 목소리는 낮고 평평해서 오히려 등 뒤에 세워 둔 칼날 같았다.

돈친삼은 숨을 골랐다.

계속할 이유. 그런 건 처음부터 하나뿐이었다.

"레퀴엠."

돈친삼이 불렀다. 이름을 하나씩 세지는 않았다. 세어 부르는 것은 그녀의 점호였고, 이 전장에서 그것은 이름을 붙잡는 저 사람의 호명과 같아져 버릴 테니까.

"대답해."

한 호흡.

"……배고파."

도펄이었다. 너무 작고 너무 느리고 위태롭게 흔들리는 목소리였지만 분명히 돌아왔다.

그거면 충분했다.

살아 있는 쪽은, 대답한다.

"아이기스, 방어선."

리엘아르가 대열 앞으로 나섰다. 분과장의 지휘는 명령의 형태를 하고 있지 않았다.

"…무너지지 않게, 부탁드려도 될까요."

방패와 사슬과 실이 움직였다. 명령보다 빠르게.

"녹턴, 시야와 감각. 부탁해."

"예, 자매. 맡기십시오."

엑타르의 낮은 목소리가 서가 그늘처럼 짙게, 대열 뒤편을 덮었다.

"베리타스, 아콘 — 길목이랑 종, 절대 놓치지 마."

글자와 발자국과 조준점이 훈련장 가장자리에 하나씩 자리를 잡았다.

도즈의 이름은 부르지 않았다.

여기 없는 사람을 부르는 순간, 이 공간은 그 거짓말마저 미련으로 붙잡을 것 같았다.

하세운의 흐린 눈이 그 모든 배치를 천천히 훑어 갔다. 적의 진형을 읽는 눈이 아니었다. 대원들의 위치를 하나하나 확인하는, 분과장의 눈이었다. 그래서 더 나빴다.

돈친삼은 활을 내리지 않은 채, 저도 모르게 물었다.

"……그럼 계속하면, 다 돌아와?"

뱉고 나서야, 가슴이 칼로 찌르듯 아파 왔다. 하세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계속해야 안 죽어."

"돌아오는 거랑, 살아 있는 건 달라."

돈친삼은 그 흐린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숨만 붙어 있으면 되는 게 아니잖아."

하세운의 빈 오른손이, 세이가 있어야 할 허공을 어긋난 박자로 움켜쥐었다.

부서졌는지, 누군가를 구하다 놓쳤는지, 마지막 전장 어딘가에 묻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마른 손끝이 아직도 원드의 무게를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은, 뼈저리게 다가왔다.

*기이잉―*

공기가 다시 현처럼 울었다.

「 Harmonia Animarum 」

루미 없는 선율이 다시 전장을 덮었다. 한 번 겪은 박자였다. 그런데 안다고 버텨지는 종류가 아니었다. 잔영들의 발이 한꺼번에 같은 박자로 모래를 짓눌렀다.

*쿵.*

첫 박동이 대원들의 발목을 끌어내렸다.

*쿵.*

두 번째 박동이 어깨를 같은 방향으로 숙이게 만들었다.

버티게 하는 노래가 아니라 쓰러지는 법을 잊게 만드는 박자였다. 발끝이, 심장이, 숨이 하나의 리듬에 휘감겼다.

그 속에서 단 한 사람만은 어긋나 있었다.

쟌디였다.

모두의 발이 같은 순간 가라앉을 때, 그녀의 발만 반 호흡 늦게, 아니 반 호흡 자유롭게 모래를 디뎠다. 선율은 그녀의 곁을 지나가면서도, 끝내 그녀를 통과하지 못했다.

"…쟌디 씨에게는, 닿지 않고 있습니다."

유라가 관측을 짚어 냈다.

"음."

닿지 않는다.

그 말의 온도를, 돈친삼은 나중에야 알게 된다. 어떤 노래도, 어떤 위로도 그녀에게는 닿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은 다만 리듬의 감옥 속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발이, 잔영들의 대열을 향해 달려 나가는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하얀 잔광이 모래 위에 곧게 그어졌다.

*팟!*

쟌디가 잔영의 진형 한가운데를 가르며 지나갔다. 같은 박자로 움직이던 잔영들의 대열에, 처음으로 어긋난 줄 하나가 생겼다.

그 틈으로 다른 박자가 흘러들었다.

노래였다.

금빛 음표가 얇은 선으로 이어지며 전장 위로 퍼졌다. 밀르아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눈을 감은 채 부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스스로 부르는 줄 아는 노래였다.

◈ 통신지금. 한 호흡 늦게.

통신 너머에서 현실의 하세운이 박자를 짚었다. 제 선율의 원형을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 통신…그래. 그거야.

묶여 가던 심장이, 한 호흡 어긋난 박자를 붙잡았다.

발목이 풀렸다. 어깨가 제 높이로 돌아왔다. 강제된 리듬과 노래의 박자가 전장 위에서 맞물려 삐걱대다가 — 아주 조금씩, 노래 쪽으로 기울었다.

선율이 전장을 묶는 원경

시로냐의 사슬과 라이라의 실이 밀르아의 주위를 둘러쌌다. 노래가 끊기면 전부 끝이었다.

돈친삼은 지켜보았다.

노래가 닿는 자리마다 대원들의 숨이 돌아오는데 — 잔영들 사이에서 홀로 검을 휘두르는 쟌디에게만은, 그 금빛 음표가 스치지도 않고 지나갔다.

혼자 버티는 문지기.

"쟌디! 무리하지 마!"

"괜찮아."

돌아온 대답에서, 늘 붙어 있던 말끝이 완전히 벗겨져 사라져 있었다.

"문지기는, 원래 문 밖에 서 있는 거야."

"중앙부터."

리레군이 방패를 고쳐 쥐고 앞으로 나섰다.

중앙의 녹색 못이 박동할 때마다, 쓰러진 잔영들이 쓰러지기 전으로 되감겼다. 그 되감김의 결을, 리레군의 금빛 눈이 좇았다. 되감기는 순간마다 공기가 미세하게 뒤로 당겨지는 느낌이었다.

"되감기는 순간의 가장자리에, 옅은 반동이 있습니다."

그의 손끝에 금색 아지랑이가 피었다.

"그것만, 끊겠습니다."

손날이 허공을 그었다.

*사악.*

끊긴 것은 빛자국이 아니라, 빛자국이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반동의 가장 바깥, 가장 옅은 한 겹이었다.

되감김이, 한 호흡 늦어졌다.

리레군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무뎌진 손가락을, 그는 두어 번 쥐었다 폈다.

그 한 호흡 사이로 시로냐의 사슬이 재빠르게 날았다.

「 판결의 빛 」

백색 사슬이 일어서려는 잔영 셋을 한꺼번에 감았다. 끊어 내려는 것이 아니라, 놓치지 않을 만큼만 조이며 잔영들의 무게중심을 천천히 무너뜨렸다.

*철컥.*

"지금입니다."

돈친삼은 이미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시위가 손끝을 저릿하게 파고들었다.

한 호흡의 정지. 나무 냄새.

*퉁!*

두 번째 화살이 중앙의 녹색 못, 시로냐가 짚어 준 뿌리 쪽 가장 얇은 결을 꿰뚫었다. 화살대가 부르르 떨리며 멈췄다.

*퍼억!*

이번에는 화살이 미끄러지지 않았다.

기괴할 만큼 조용했다. 그다음, 발밑에서 얕은 숨이 툭 빠져나갔다.

대원들의 발목을 옥죄던 녹색 빛줄기 하나가 스르륵 풀려났다. 버티고 있던 이들이 한꺼번에 무너질 뻔한 순간, 아이기스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방패가 바닥을 눌렀고 사슬이 밀려나는 몸들을 받쳐 안았다.

누군가 모래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넘어지지는 않았다.

이번 회복은 강제가 아니었으니까. 사람들이, 서로를 받쳤으니까.

*하나.*

*비로소, 쓰러질 수 있게 됐다.*

중앙 못을 꿰뚫는 화살

"아직……."

중앙의 하세운이 읊조렸다. 울음에 가깝게 갈라진 목소리로.

출구는 여전히 닫혀 있었다.

바깥으로 이어져야 할 길목 위에서 녹색 빛이 흉측하게 뒤틀렸다. 길이 열리려는 순간마다, 빛은 발자국을 도로 안쪽으로 접어 넣었다.

출구 뒤편, 가장 깊은 그림자 앞에 하인리티스가 조용히 섰다.

처음으로 신호가 왔다.

"……들어간다."

낮고 건조한, 짧은 한 마디였다.

엑타르의 고개가 아주 살짝 움직였다. 그가 놀람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예, 형제."

거구가 그림자 속으로 스몄다. 맑고 고요한 물에 잠기듯, 소리도 무게도 없이. 지워질 자리에 먼저 제 몸을 밀어 넣어, 그곳이 아직 길이라는 것을 몸으로 증명하는 방식이었다.

이윽고 그림자 저편에서 보고가 돌아왔다.

"후방, 비었다."

쟌디가 그 말을 받아 출구 쪽으로 달렸다. 클레이모어가 낮게 깔린 궤적으로 모래를 갈랐다.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서 모래알이 튀어 올랐다.

*서걱.*

검이 지나간 자리에, 빛의 결이 문턱처럼 새겨졌다. 닫히려는 경로 위에, 봉인의 획으로 눌러 쓴, 열린 채로 잠긴 문턱.

"닫히면, 다들 못 나가……!"

쟌디의 팔꿈치가 떨렸다. 문턱을 새긴 검끝이 모래에 박힌 채, 닫히려는 힘을 온몸으로 거슬러 버텼다.

엘리시온의 옷깃에서 푸른 액세서리가 핸드벨의 형태로 풀려나 있었다.

리게이아가 울렸다.

*디링.*

「 백야의 노래 」

그 울림에서 하얀 나비가 분리되어 날아올랐다. 한 마리, 또 한 마리.

나비가 스치는 자리마다, 마지막 전투의 참상이 아주 미세하게 뒤틀렸다.

죽음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기억이, 지금 여기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몸과 완벽하게 겹치지 않도록 — 얇은 틈이 생겼다.

어둠 속 침투와 흰 나비

"우리는, 길을 기억합니다."

엘리시온이 노래하듯 나직이 말했다.

애수화가 무릎을 낮췄다. 팔찌의 짙은 보라가 빛났다. 하얗게.

그녀의 시야에, 일행이 이 훈련장까지 걸어 들어온 발자국들이 하얗게 떠올랐다. 애수화는 그 발자국을 하나씩 다시 눌러 밟듯 표시해 나갔다. 돌아갈 길, 들어온 만큼 정확히.

지워지려는 빛과 표시하려는 손이 발자국 하나를 두고 맞섰다. 애수화의 무릎이 모래에 닿았다. 손은 멈추지 않았다.

*탕!*

츄니티의 탄환이 길목의 녹색 빛 가장자리를 때렸다.

그녀의 손가락은 방아쇠에 걸려 있지 않았다. 조준을 마치고 손가락을 뗀 채 기다리다가 쏘는 그 순간에만 손끝을 걸었다. 제 총 공리의 총신에서 자색 빛이 새어 나오는 것도 오직 그 한순간뿐이었다.

"기록은 못 해도, 맞힐 수는 있죠."

금빛 음표가 문턱과 발자국 위로 스며들었다. 밀르아의 노래가, 지워지려는 것들에게 버틸 힘을 흘려 넣고 있었다. 신성한 빛으로 세워진 것들은, 신성한 빛의 노래를 먹고 버텼다.

돈친삼의 세 번째 화살이 시위를 떠나갔다.

*퉁!*

화살은 길목을 막은 빛의, 바깥 테두리의 가장 얇은 결을 관통했다. 촉끝이 결을 가르는 소리가 유리처럼 얇게 울렸다.

요란한 소리는 없었다. 대신 화살이 지나간 자리에서 모래가 아래로 푹 꺼졌다. 형태만 흉내 낸 자국이 아니라, 실제 사람의 발이 밟고 눌렀던 만큼의, 깊고 정직한 깊이였다.

하나가 깊어지자 다음 발자국이 버텼고 그다음 발자국도 무너지지 않았다.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둘.*

*비로소, 떠날 수 있게 됐다.*

"나가면……."

하세운이 바보처럼 중얼거렸다.

"전부, 끝나면……."

"끝나도 다 여기 있어."

돈친삼이 대답했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 화살을 시위에 걸며.

하세운의 빈 오른손이, 높이 들렸다.

「 Animo Surge 」

*두근!*

빈손의 마지막 Animo Surge

전면 파동이었다.

잔영 전원이 마지막 순간을 되풀이하며 밀려들었다. 쓰러지고 일어나고 다시 베여 나가는 — 그 끔찍한 반복의 전부가, 한꺼번에 이쪽을 향해 몰려들었다.

전장 자체가 앞으로 닫혀 걸렸다.

*쿠구구궁―*

리레군의 방패 밑단이 모래에 깊은 고랑을 파며 밀려났다. 왼쪽에서 들리던 소리가 짓눌려 작아졌다. 발밑의 그림자가 종이 한 장처럼 얇아졌다.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진동이 뼈 속까지 울렸다.

전원이, 한 걸음씩, 중앙 바깥으로 밀려났다.

벽.

돈친삼의 머릿속에 그 한 글자가 박혔다.

사람 하나가 앞에 선 것이 아니었다. 혼자 버텨온 세월 전체가 — 전장의 너비만큼 펼쳐져서, 누구도 그녀에게 닿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서 있었다.

방패 너머 녹색 파동

"막는다."

록커킴이 정면으로 나섰다.

*콰앙!*

파동의 첫 겹이 그의 방어를 때렸다. 견갑의 룬에서 백금색 불꽃이 일었다.

*콰앙!*

두 번째 겹. 백금 불꽃이 더 단단해졌다.

세 번째. 네 번째.

맞을수록, 그의 방벽은 무너지는 대신 여물었다. 두들겨 맞은 쇠가 더 단단해지듯이. 파동이 칠 때마다 백금의 결이 한 겹씩 조밀해졌다.

"롸큰롤."

한 옥타브 낮은 소리였다.

시로냐의 사슬이 리레군의 방패를 감아 뒤에서 받쳤고 라이라의 연보라 실이 흔들리는 대열 사이를 이어 붙였다.

라이라는 웃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나왔을 그 말, 오, 괜찮은데. 그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지금이 어떤 순간인지를 또렷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낫 끝이 돈친삼의 그림자를 살짝 그었다.

연보라 실이 그림자에서 피어올라 시위를 쥔 오른팔에 얇게 감겼다. 라이라가 한쪽 무릎을 꿇고 벽에 등을 기대듯 몸을 낮췄다. 실을 건 사람은 그 자세로 무방비가 된다. 그런데도, 실은 흔들리지 않았다.

당기는 힘이 아니라, 파동의 반동에 오른팔이 튕겨 나가지 않도록, 팔꿈치 안쪽을 묵직하게 받쳐 주는 힘.

리엘아르가 대열의 맨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세운을 살리고 싶다.

이 파동을 막아야 한다.

두 마음은 다른 방향을 보고 있지 않았다. 파동을 막는 것이 곧 그녀를 살리는 길이라면, 자비와 투쟁이 한 결심 안에서 포개졌다.

그 순간.

리엘아르의 흑발이 한 가닥에서 다음 가닥으로 번지며, 은빛으로 물들어 갔다. 빛의 결이 흐르는 물처럼 그녀의 몸을 따라 고요하게 퍼졌다. 본인은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다만 망설임의 어미가 사라진 목소리만이, 그 변화를 증언하고 있었다.

"갑니다."

한 걸음.

"지키겠습니다."

아이기스 전체가 한 덩어리로 버텼다. 방패와 사슬과 실과 불꽃이, 같은 호흡으로 맞물렸다. 서로 다른 무게들이 하나의 진동처럼 겹쳐졌다.

사슬 감긴 방패와 뻗는 손들

기어이, 단 한 걸음도 더 물러서지 않았다. 발바닥이 모래를 움켜쥐듯 파고들었다.

"겁이…… 보여요."

리엘아르가 파동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은빛으로 물든 머리카락이 빛의 결을 따라 가늘게 흔들렸다.

"멈추는 순간, 자기가 늦었다는 걸 다시 보게 될까 봐. 그게 — 보여요."

숙의 통신이 들어왔다.

우회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는 문장이었다.

◈ 통신한계입니다.

돈친삼의 등줄기가 서늘하게 식었다.

한계. 그다음에 오는 것은 정해져 있었다. 오류 격리. 차단 명령. 이 전장이 통째로 잘려 나간다.

그때, 파동의 굉음이 노래를 통째로 삼켰다.

금빛 음표의 선율이 반 소절, 끊겼다.

밀르아의 몸이 휘청했다. 노래가 멎으면 전부 끝이었다. 시로냐의 어깨가 그녀를 받쳤고 라이라의 실이 그녀의 무릎을 붙들었다. 밀르아는 받쳐진 채로, 끊긴 소절의 다음 음을 기어이 이어 불렀다.

잔영들이 마지막 쇄도를 시작했다.

무너지는 노래. 바닥난 접속. 밀려드는 반복의 파도.

효리가 쇄도의 선두를 향해 시선을 붙박듯 고정했다.

읽어야 했다. 어디로 올지. 누구부터 막아야 할지.

읽히지 않았다.

잔영들의 다음 수가 안개 낀 것처럼 뭉개졌다. 이제껏 한 번도 어긋난 적 없던 그 박자였다. 제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제 모습을 한 잔영이, 마음 어딘가를 계속 흔들고 있었다.

괜찮아요, 라고 말하려 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효리는 읽어 내기를 포기했다. 대신 스태프를 고쳐 쥐고 흐린 시야 그대로, 대열의 빈자리를 몸으로 메꿔 나갔다. 읽지 못해도, 설 수는 있었다. 이 분과에 와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이었으니까.

진다.

계산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전장에 서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냄새였다. 이제 곧, 진다는 냄새였다.

그런데.

차단 통신은, 끝내 오지 않았다.

한 호흡.

두 호흡.

세 호흡.

침묵이었다. 자르겠다고 예고한 사람이 끝내 자르지 않는, 그런 침묵.

그 몇 호흡의 유예 속으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 통신돈친삼.

현실의 하세운이었다.

"응."

짧은 대답인데도 목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 통신이제 끝내도 돼.

잡음이 한 번 거칠게 긁혔다.

◈ 통신네 목소리가 들리면, 나도 똑같이 듣고 있어. 너 혼자 그 지옥을 버텨온 거…… 다 알아.

중앙의 하세운이, 처음으로 통신이 흘러나오는 허공을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 통신그러니까 이제 — 애들을, 놓아줘.

"놓으면……."

중앙의 하세운의 입술이 떨렸다.

"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잖아."

끝내도 된다는 말은 포기하라는 선고가 아니었다. 끝을 맺어야 비로소 온전히 살릴 수 있다는 — 단 하나 남은, 구원의 문장이었다.

잔영들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허락은 내려왔지만 이 전장에 새겨진 지휘는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쇄도의 마지막 물결이 종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때, 회색 안개가 전장 가장자리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 인필트레이터즈 디스코드 」

엑타르였다. 안개는 소리도 빛도 삼키지 않았다. 다만 그 회색이 스치는 자리마다, 잔영들을 부리던 지휘의 결이 뚝 끊겼다. 어긋난 소리 하나가 낮게 긁혔다.

잔영들의 발이 몇 호흡 동안, 갈 곳을 잃고 헤맸다.

안개 너머의 엑타르는 이쪽에서 보이지 않았다. 바깥의 어떤 신호도 그에게 닿지 않는, 홀로 닫힌 회색 속이었다. 그는 그 몇 호흡을 사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전장에서 잘라내고 서 있었다.

록커킴이 천천히 장갑을 벗었다.

맨손바닥이 종루 기둥에 닿았다. 손끝이 아니라, 손바닥 전체로. 무언가를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들으려는 자세였다.

기둥 안쪽 깊은 곳에서, 금속의 낮은 숨이 그의 손바닥에 닿았다.

"……밖에서 누르고 있다."

록커킴이 말했다.

"종은, 살아 있어."

죽은 것이 아니었다. 울지 못하게, 눌려 있을 뿐이었다.

돈친삼은 마지막 화살을 시위에 걸고 턱밑까지 당겼다.

종을 막은 녹색 매듭이 보였다. 세 빛자국 중 가장 얇고, 그래서 가장 지독하게 단단한 것. 오직 종이 울리는 순간만을 막기 위해 굳어 있는, 저주의 매듭.

시로냐가 짚어 준 결은 매듭의 위가 아니라, 그 아래였다.

하세운의 손이 필사적으로 올라갔다. 누군가 쓰러지기 직전마다 본능적으로 움직이던 그 손. 늦지 않으려고 언제나 남들보다 먼저 나가던 손. 타인의 숨은 끝까지 붙잡으면서 제 손등의 피는 한 번도 닦지 못했던 손.

그 손이, 허공에서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맸다.

종을 막은 녹색 매듭, 길 잃은 손

"끝났다고 말해 버리면…… 전부……."

"같이 말할게."

돈친삼이 말했다.

"세운."

분과장의 직함도, 최후의 빛이라는 부고도 아니었다.

그냥, 이름이었다.

통신 너머에서 똑같은 목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 통신세운.

"이 전투, 이제 끝내도 돼."

저쪽의 하세운이 — 처음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시위를 쥔 손가락이, 그 찰나를 먼저 알았다. 굳어 있던 손끝의 저림마저 그 순간엔 느껴지지 않았다.

전장이 가라앉았다. 발밑의 모래마저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파동도, 선율도, 잔영들의 발소리도, 제 심장 소리마저도 — 전부, 아주 먼 곳으로 물러났다. 남은 것은 활대의 나무 냄새와, 손끝의 팽팽한 압력과, 눈을 감은 사람의 얼굴뿐이었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퉁.*

화살이 매듭 아래, 가장 얇은 결을 관통했다. 촉끝을 통해 팽팽한 실이 툭 끊어지는 손맛이 전해졌다.

종 끈을 움켜쥐고 있던 녹색 매듭이 탄력을 잃었다. 꼬였던 결이 손끝만큼씩 느슨해지며, 스르르 풀려났다.

눌려 있던 종이, 스스로 울었다. 청동 속에서부터 밀려 나온 떨림이었다.

*뎅――――*

단 한 번.

훈련장 전체가, 그 맑고 거대한 소리를 온전히 들었다. 종소리가 가슴뼈까지 파고들며 낮게 떨렸다.

*셋.*

*비로소, 끝났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잔영들이 정렬하기 시작했다.

모의전이 끝난 뒤, 분과장의 마지막 말을 기다리는 대원들처럼.

도펄의 잔영이 고개를 숙였다. 이리스의 잔영이 대검을 내렸다. 쟌디의 잔영이 남긴 잔광이 모래 위에서 한 번 튀고 스러졌다. 효리의 잔영이 뿌린 깃털이 가장 늦게, 끝을 파르르 떨다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이름 없는 미래의 잔영들은 마지막까지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다. 다만 하세운의 시선이, 그 주인 없는 빈자리들을 하나씩 따스하게 짚고 지나갔다.

하세운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털썩.*

모래 위로 무너진 그녀에게 돈친삼이 달려가려다 멈췄다. 하세운이 손을 까딱여 제지했기 때문이다. 붙잡으려는 손짓이 아니라,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손짓이었다.

고개를 깊이 숙인 채, 그녀는 웃으려는 사람처럼 짧은 숨을 내쉬었다.

웃음이 아니었다.

울음이었다.

"왜……."

마른 손가락이 모래를 한 움큼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버석하게 흘러내렸다.

"왜 다들…… 나만 남겨두고 먼저 갔어."

원망이었다. 그리고 그 원망은 바로 다음 숨에서 자책으로 무너졌다.

"아니야. 미안해. 내가…… 내가 무능해서, 늦었어."

녹색 빛이 손등 위에서 버릇처럼 한 번 튀었다. 상처를 닫으려는, 오래된 습관. 그녀는 그 빛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나…… 너무 오래, 혼자 서 있었어."

돈친삼은 활을 내린 채, 그 독백을 온전히 듣고 있었다.

"도펄. 이리스. 쟌디. 효리."

이름이 하나씩, 고요한 훈련장에 떨어졌다. 이번에는, 이름을 붙잡는 호명이 아니었다.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매어 두는 족쇄의 소리가 아니라 — 잘 가라는, 인사에 가까운 것.

"돈친삼."

"응."

돈친삼은 정직하게 대답했다.

하세운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는 붉게 젖어 있었고 입술은 끝내 웃음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 얼굴에는 아주 작은 안도가 어려 있었다. 먼지가 켜켜이 쌓여 한눈에 알아보기도 힘든, 그런 안도였다.

"아직……."

목소리가 가늘게 끊어져 나갔다.

"나, 혼자가 아니네."

그 말이 고요한 훈련장 위에 한동안 머물렀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다. 종소리의 여운이 그랬듯이.

이윽고 그녀의 시선이 대원들을 지나, 아직 오지 않은 어딘가를 향했다.

"너희는 아직 ■■을 몰라."

푸른 노이즈가 그녀의 입술 위를 덮쳐 왔다.

"그날 레퀴엠은…… 또다시 ■■ 앞에 서게 될 거야."

돈친삼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하세운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또 한 번 바보처럼 웃어 보이려 애썼다.

"돈친삼. 그때 너는 주저 없이 ■■을 쏘고, 도펄은 바보처럼 ■■라고 웃고……."

말이 칼로 잘려 나갔다. 하얀 검열의 빈칸이 문장보다 먼저 내려앉았다.

"미안해. 그 미래까지…… 내가 전부, 막아줬어야 했는데."

"세운."

돈친삼이 나직하게 불렀다.

하세운은 더 대답하지 못했다. 몸을 앞으로 둥글게 접은 채, 차가운 모래 위에서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울기만 했다.

통신은 한동안 조용했다. 제 얼굴을 한 존재의 울음을 듣고 있는 사람이, 어떤 문장을 골라야 할지 몰라 침묵하고 있었다. 그런 조용함이었다.

마침내, 아주 작고 여린 소리가 돌아왔다.

◈ 통신……응.

그 한 글자에, 저쪽의 하세운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감은 얼굴 위로 푸른 노이즈가 번져 갔다. 모래를 쥔 손가락의 윤곽이 기하학적인 빛의 조각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손등의 마른 핏자국이, 찢어진 소매가, 허리까지 흘러내린 은발이, 하나씩 차가운 푸른 면으로 바래져 갔다.

*지직.*

그녀는 마지막까지 울고 있었다.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울음이 그친 것이 아니라, 잡음이 그 울음을 한 음절씩 가져가고 있는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결국 얼굴이었다.

아이처럼 눈물로 얼룩진, 너무 오래도록 버틴 사람의 얼굴.

그 얼굴이 돈친삼을 한 번 더 눈에 담으려는 듯 들렸다 — 눈동자가 맺히기 전에, 푸른빛이 시야를 지웠다.

그리고 하세운은, 사라졌다.

푸른 파편으로 풀리는 퇴장

종소리의 여운이 아직 모래 바닥을 타고 흘렀다. 청동의 진동이 공기째로 잦아들고 있었다.

그 여운 위로, 푸른 홀로그램 문자가 조용히 떠올랐다.

「 꺼져버린 빛을 틔우기 위한 발버둥 - 클리어 」

문자는 종소리의 끝자락에 맞춰, 노이즈처럼 흩어져 갔다.

돈친삼은 발밑에서 모래가 신기루처럼 빠져나가는 감각을 느꼈다. 딛고 선 자리마저 한 뼘씩 낮아지는 듯한 깊이였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제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시위의 압력이 아직 그 자리에 저릿하게 남아 있었다.

이 압력은 — 돌아가서도, 한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하나 더. 끝내 오지 않았던 차단. 예고까지 하고서 자르지 않은 그 침묵의 이유를, 돈친삼은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