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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01 / 03

무서운 이야기 하실 분

# 01. 무서운 이야기 하실 분

여름밤이 되어도 성역은 낮의 열을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성역은 우리가 지내는 곳이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우리끼리만 아는 자리.

낮 동안 달구어진 정원 돌바닥은 해가 넘어간 지 한참인데도 여전히 미지근했다. 맨손으로 짚으면 온기가 그대로 배어 나왔다.

정원 한가운데 놓인 생명의 분수만이 그 더위를 모르는 듯했다. 맑은 물줄기가 돌 홈을 타고 내려가며 서늘한 기운을 실어 날랐다. 나는 그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여섯 번까지 세다 그만두었다.

세어 두는 버릇은 오래됐다. 보고 들은 것을 수첩에 적어 두는 게, 이곳에서 내가 맡은 일이니까. 요즘은 나에 관한 것도 한 줄씩 적어 두려 애쓰지만 여전히 물방울이나 잎사귀 쪽이 나에게는 훨씬 쉬웠다.

풀벌레가 울었다. 정원의 풀과 나무는 어둠이 짙어질수록 제 몸에 옅은 빛을 물었다.

잎맥을 따라 창백한 초록이 번지는 그 빛은, 등불을 다 끄더라도 정원을 완전한 어둠으로는 놓아두지 않을 만큼이었다. 밤이 깊을수록 도리어 또렷해지는 빛이라,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조금 서늘해지곤 했다.

화로에서 숯이 익었다. 마른 나무가 속으로 무너지는 냄새가 훅 끼쳤다.

*탁, 타닥—*

"이야기하면 시원해진대."

라이라가 화로 너머에서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우리 중 가장 늦게 이곳에 온, 제일 밝은 아이였다. 물결처럼 끝이 올라가는 말투는 더위에도 지치는 법이 없었다.

"내가 살던 세계에선 여름밤마다 그랬거든. 다 같이 모여서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거야. 등골이 서늘해지면 진짜로 더위가 가신다니까?"

"헤드라인 감이네요."

츄니티는 벌써 수첩을 펼치고 있었다. 무엇이든 적어 두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었다. 무릎 위에 반듯하게 편 종이 위로 펜이 사각사각 지나갔다.

『주간 헤븐워커』는 츄니티가 혼자 만드는 소식지였다. 오늘 밤 판을 벌인 건 라이라였지만 그걸 기록으로 남기기로 한 건 이 사람이었다.

"이계의 여름 풍습, 성역에서 재현. …나쁘지 않아요."

유라는 아무 말 없이 화로 앞자리를 차지했다. 좀처럼 본부에 머물지 않고 늘 먼 길을 도는 사람이라, 이렇게 마주 앉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부지깽이로 숯을 고르는 손이 익숙했다. 불꽃이 그 얼굴 위에서 낮게 일렁였다.

"그래서, 이걸 빌려 왔어요."

츄니티가 발치의 나무 상자를 열었다. 오래된 나무 냄새와 함께, 유리에 싸인 자그마한 등불이 여섯 개 드러났다.

저마다 안에서 낮은 불씨를 물고 유리 너머로 따뜻한 주홍빛을 흘리고 있었다. 하나를 집어 드니 손바닥에 묵직한 온기가 옮겨 왔다.

츄니티가 등불을 하나씩 손끝으로 짚어 셌다.

"하나, 둘… 여섯. 정확히 여섯이에요."

이 사람이 세면 틀리는 법이 없었다. 한번 센 것을 다시 세는 일도 없었다.

"우리 서고에 이계 풍습이 하나 적혀 있더라고요. '등불 백 개의 밤'. 이야기 하나가 끝날 때마다 등불을 하나씩 끄는 거예요. 방이 점점 어두워지고… 마지막 하나까지 꺼지면, 진짜가 온다고."

"백 개?!"

효리가 눈을 크게 떴다. 겁이 많으면서도 늘 제일 먼저 나서는 아이였다.

"백 개는 무리예요. 빌려주는 데도 한도가 있어서, 여섯 개만 받아 왔어요."

츄니티가 담담하게 덧붙였다.

"서고를 맡은 숙 분과장님이 딱 하나만 당부하셨어요. 마지막 등불은 끄지 마세요, 라고."

*사각.*

수첩에 펜이 지나갔다. 등불 여섯, 빌림. 눌러쓴 글씨가 종이 뒤로 도드라지는 것을, 나는 곁눈으로 보았다.

"좋아, 그럼 규칙!"

라이라가 손가락을 세웠다.

"여섯 명이니까 한 사람당 하나! 이야기 하나 끝나면 등불 하나 끄기. 간단하지?"

"저는 이야기가 아니라 기록을 할 생각이었는데요."

내가 말하자 라이라가 눈을 반짝였다.

"기록도 이야기잖아? 셰윌라도 하나 해야지."

반박할 말을 찾다 그만두었다. 라이라와 이야기하다가 끝까지 반박할 말을 찾아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라이라가 손가락을 하나씩 꼽다 말고 갸웃했다.

"어…? 여섯 명이 하나씩 끄면 여섯 개가 다 꺼지는데. 그럼 마지막 사람은… 끄면 안 되는 거 아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츄니티가 수첩을 넘기며 말했다.

"기록엔… 백 번째까지 간 사람들이 그다음 어떻게 됐는지는 안 적혀 있어요. …적을 사람이 안 남았나 봐요."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는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다 끄면 진짜가 온다는 이야기와, 마지막 하나는 끄지 말라는 당부가 한자리에서 겹친 참이었다.

웃자고 벌인 자리였는데, 목덜미에 옅은 것이 스쳤다. 여름밤 습기라기엔 지나치게 찬 기운이었다. 나는 그것을 그냥 습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뭐, 하다 보면 알겠지! 리엘아르 선배가 정원 써도 된댔으니까, 늦기 전에 시작하자."

라이라가 손뼉을 쳤다. 마른 소리가 정원 담벼락에 부딪혀 한 뜸 늦게 되돌아왔다.

그때 정원 어귀에서 발소리가 뒤늦게 도착했다.

"에-, 늦어서 죄송해요! 오늘은 당직이 아니라서… 핫, 다들 벌써 모이셨네요!"

밀르아였다. 우리 중 막내였다.

밤마다 탑에 들어가 결계를 지키는 당직을 서는 아이라, 이런 자리엔 좀처럼 오지 못했다. 오늘은 그 당직이 없는 날이라고 했다.

숨이 조금 찬 채로 인사를 하다 말고 그 아이의 시선이 정원 구석 어딘가에 잠깐 머물렀다. 등불 빛이 눈동자에 어리는 순간이었는지, 그 눈빛이 문득 낯설게 굳었다.

"밀르아, 뭐 봐?"

"에? 아, 아뇨! 벌레라도 있나 해서요. 에헤헤."

밀르아가 얼른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츄니티가 데려온 고양이 먼지가, 그 발치에서 앞발을 뻗어 하품을 했다.

여섯이 다 모이자, 유라가 잔을 돌렸다. 사람 수를 세더니, 하나를 더 엎어 두었다.

예비 잔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넘겼다. 그날 밤 세어 둔 것 중에, 그 하나가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을 줄은 그때는 몰랐다.

"그럼 판을 벌인 사람이 먼저!"

라이라가 신나서 나섰다.

"친구의 친구가 겪은 얘긴데—"

"출처가 친구의 친구면 확인할 방법이 없는데요."

"아, 츄니티, 무서운 이야기는 원래 그런 거야! 끝까지 들어 봐. 그 친구가 훈련장에서 밤 근무를 서는데, 거울에—"

"꺄앗!"

효리가 먼저 비명을 질렀다. 라이라의 이야기는 아직 거울을 보여 주지도 않은 참이었다.

"아직 안 무서운 부분이거든?!"

라이라가 발끈했다. 이야기는 자꾸 다른 사람들 입에 걸려 넘어졌고 정작 무서운 대목에 이르기도 전에 다들 웃느라 바빴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하나 더 많았다는 결말은, 이미 세 번쯤 끊긴 뒤라 서늘하기보다 안쓰러웠다.

"자, 그래도 이야기는 이야기니까! 하나 끄자."

라이라가 등불 하나에 입김을 불었다.

*후—*

불꽃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 왜 안 꺼져?"

"이 등불은 입으로는 안 꺼져요."

츄니티가 빌릴 때 함께 받은 설명서를 꺼내 읽었다. 유리를 손끝으로 톡 두드리면 불이 잦아든다고 했다. 라이라가 몇 번 헛손질을 한 끝에야, 첫 번째 등불이 유리 안에서 스르르 눈을 감았다.

*톡.*

주홍빛 하나가 사라지자, 그 자리를 풀과 나무의 창백한 초록빛이 슬그머니 메웠다. 다섯 개가 남았다.

"그, 그럼 이번엔 제가!"

효리가 두 주먹을 쥐고 나섰다. 무서운 이야기라면 자신 있다는 얼굴이었다.

"제가 예전에 살던 마을에… 밤마다 문을 두드리는 게 있었어요. 똑, 똑, 똑… 세 번. 문을 열면 아무도 없고요. 그런데 그날은—"

효리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제가 지어낸 이야기에 제가 먼저 빨려 들어갔다.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이야기를 짓는 본인이 제일 잘 알았고 그래서 제일 먼저 무서워했다.

"그, 그날은… 어, 잠깐만요. 이거 제가 생각해도 좀…"

"효리 씨, 그다음은요?"

"…그건 다음에 생각해요!"

효리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괜찮아요! 하나도 안 무서워요! 제가 왜 놀랐냐면… 그냥 놀란 거예요!"

이야기는 끝내 마무리되지 못했다. 그런데도 다들 웃었다. 끝맺지 못한 이야기가 끝맺은 이야기보다 무섭다는 것을, 그 자리의 누구도 아직 몰랐다.

효리가 등불을 끄려다, 놀란 손끝이 옆의 것까지 건드릴 뻔했다. 하마터면 두 개가 한꺼번에 꺼질 뻔한 것을, 라이라가 웃으며 효리의 손을 붙들어 도로 지켜 냈다.

*톡.*

남은 불꽃들이 서로 조금 더 가까워 보였다. 그만큼 우리 사이로 그늘이 넓어졌다.

바람 한 점 없는 밤인데, 그 불꽃들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아무도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나조차, 세어 두지 않았다.

"제 차례군요."

츄니티가 수첩을 넘겼다. 앞의 두 사람과는 목소리의 결이 달랐다.

지어낸 이야기를 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적어 둔 것을 그대로 읽는 목소리였다.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또렷했다.

"이건 우리 소식지엔 못 실은 이야긴데… 사실 비밀도 아니고, 그냥 기록이에요. 3층 공용 세탁실 정리함 둘째 칸. 어느 날 아침에 처음 나왔어요. 흰 면장갑이 한 짝이 아니라 정확히 한 켤레, 왼쪽 오른쪽 다 있었고요."

농담을 섞지 않는 목소리가 오히려 자리를 가라앉혔다.

"주인을 못 찾아서 분실물 함에 넣어 뒀는데, 이레 뒤, 같은 자리에 똑같은 켤레가 또 있었어요. 크기도 색도 똑같았고요. 다시 이레 뒤, 세 번째. 이번엔 제가 표시까지 해 뒀는데도 그대로였어요."

"세 번 다 꼭 이레 간격이에요. 세 번 다 같은 칸, 세 번 다 같은 켤레. 누가 가져다 놓는지, 왜 매번 그 칸인지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어요."

츄니티가 수첩에서 눈을 들었다.

"이건 지어낸 게 아니라 그냥 있었던 일이에요. …흥미롭죠. 다음 이레에도 나오는지, 제가 직접 지켜볼 거예요."

이번에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등불을 끄는 손이 처음으로 조심스러웠다. 손끝이 유리에 닿기 전에 한 뜸 망설였다.

*톡.*

이제 화로만이 우리 얼굴을 붉게 밝혔다. 등불이 하나 꺼질 때마다, 어둠이 우리 쪽으로 한 걸음씩 다가와 앉았다.

"…어? 진짜 시원해졌는데?"

라이라가 목덜미를 문지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봐, 내가 뭐랬어. 이야기하면 시원해진다니까!"

정말로, 여름밤의 미지근한 공기 사이로 서늘한 기운이 한 줄기 지나간 참이었다. 팔뚝에 좁쌀 같은 소름이 돋았다. 나는 그것이 라이라의 말대로 이야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밀르아가 정원 구석을 다시 한 번 흘끔 보았다. 그러고는 슬며시, 제 옆의 방석 하나를 옆으로 밀어 자리를 넓혔다. 누군가 앉을 자리를 내주는 손짓이었다.

먼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하필 그 넓혀 둔 구석 쪽으로 걸어가 앉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운 채로.

세 개의 등불이 남았다.

"다음은~ 유라!"

라이라가 외치고는, 곧 아차 하는 얼굴이 되었다. 좌중의 공기도 같은 말을 했다. 유라가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할 리 없다는 것을, 여기 모인 누구나 알았다.

정적이 내렸다. 화로에서 숯 한 조각이 폭삭 주저앉았다.

불빛이 유라의 얼굴 위에서 한 번 흔들렸다. 비 오는 날이나 모닥불 앞에서는 이 사람의 말이 느려지고 조금 풀린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유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느린 말이었다.

"…순례 중에, 한 번."

풀벌레 소리가, 일제히 멎었다.

세상이 숨을 참은 것 같았다. 방금까지 정원을 가득 채우던 울음이 한꺼번에 사라지자, 귓속이 먹먹하게 비었다.

"사흘 밤을, 따라온 게 있습니다."

남은 세 개의 불꽃이 다시 같은 쪽으로 기울었다. 이번에는 나도 곁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바람인가.

그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정원의 어떤 잎사귀도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린 것은 오직 불꽃뿐이었다. 마치 무언가가 그쪽에서 숨을 들이쉰 것처럼.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 위의 수첩을 펼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