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2 / 03
마지막 등불은 끄지 않습니다
# 02. 마지막 등불은 끄지 않습니다
유라는 말을 이었다. 서두르지도,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겪은 일을 그저 겪은 순서대로 옮기는 말투였다.
"이리아 남쪽 능선을 홀로 걷고 있었습니다. 일행은 없었어요. 늘 그렇듯 혼자였습니다."
"저녁 어스름이 내릴 즈음, 능선 위에 불빛 하나가 보였습니다. 노란빛이었어요. 마을의 등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그 불빛은, 바람이 부는데도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어요."
"방향을 잡고 걸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면, 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능선은 비어 있었습니다. 다시 걸어도, 다시 없었어요."
라이라가 무릎을 끌어안았다. 조금 전까지 이야기를 세 번씩 끊어 먹던 사람이, 이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화로의 불이 낮게 사그라들었다. 유라는 부지깽이를 놓지 않은 채, 불씨만 이따금 뒤적였다.
"날이 저물어 야영을 했습니다. 불을 피우고 앉았는데, 능선에 다시 그 빛이 떠 있었어요. 아까와 같은 자리였습니다."
"일어서서 지켜봤습니다. 몇 걸음 다가가 봤어요. 그러자 빛도 딱 그만큼 물러났습니다. 서면 서고, 걸으면 걸었어요. 거리는 줄지도, 늘지도 않았습니다."
효리가 입을 반쯤 벌린 채 굳어 있었다. 무섭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 얼굴이었다.
나는 문득, 유라가 말하는 그 능선을 우리 정원 담장 너머에 겹쳐 그리고 있었다. 어둠 저편에 노란 점 하나가 떠서, 우리가 움직이면 꼭 그만큼 물러나는 모습을.
"이틀째 밤도 같았습니다. 야영지를 옮기고 방향을 틀어도 소용없었어요. 저는 그런 밤이면 말이 많아지는 편인데, 그날만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유라가 잔을 내려놓았다. 도자기가 돌바닥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가까이 다가가 본 건 첫날 밤, 딱 한 번이었어요. 그 뒤로는 다시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저도 잘 설명하지 못하겠어요."
"사흘째 밤, 오래된 유적 초입에 다다랐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능선을 돌아봤어요. 그 빛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 뒤로 다시는 보지 못했어요."
"유적 안쪽까지 살펴봤지만, 아무 흔적도 없었습니다. 발자국도, 타고 남은 재도, 아무것도요."
"지금도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모릅니다."
유라는 잠시 화로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담담하게 마지막을 놓았다.
"…그 사흘 밤, 제 등불은 켜지 않았습니다."
정적이 정원을 눌렀다.
그럼 능선의 그 노란 불빛은, 무엇을 비추며 사흘을 따라왔던 걸까.
아무도 묻지 못했다. 물어서 답이 나올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다들 알았기 때문이다. 유라가 손끝으로 유리를 톡 건드렸고 네 번째 등불이 소리 없이 눈을 감았다.
두 개가 남았다. 초록빛이, 이제 우리 무릎께까지 차올라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효리였다.
"괜, 괜찮아요! …아, 이건 제가 저한테 한 말이에요."
"유라, 나 다음 순례 갈 때 절대 데려가지 마…"
라이라가 진저리를 치며 말하자, 그제야 굳었던 공기가 조금 풀렸다. 누군가 억지로라도 웃어 주기를, 다들 기다리고 있었던 눈치였다.
츄니티의 펜만이 유독 빠르게 움직였다.
*사각, 사각.*
"…이런 건 어디에 실어야 하나. 목격담도 아니고, 무서운 이야기도 아니고."
혼잣말에 가까웠다.
나는 남은 두 개의 등불을 보았다. 주홍빛 두 점이, 무릎까지 차오른 초록 위에서 위태롭게 떠 있었다.
이야기는 이제 두 사람 몫이 남았다. 밀르아와, 나.
"에-, 그럼… 제가 할까요?"
밀르아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무서운 이야기… 는 아닌데요. 어제 있었던 일인데요."
밝은 목소리였다. 방금 전의 서늘함을 밀어내려는 듯한. 다들 안도하며 그 아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밤에 탑의 결계를 지킬 때면 저 혼자 있을 때가 많아요. 그런데 사실 혼자는 아니고요, 마나들이 늘 재잘거려요."
"마나는… 아직 아무 모습도 없는, 순하고 어린 기운이에요. 결계 틈으로 몰려와서는 서로 먼저 말을 걸겠다고 밀치기도 하고요. 저는 그냥 웃으면서 하나씩 들어줘요."
여기까지는, 밀르아다운 이야기였다. 다들 조금 미소를 지었다. 효리가 "귀엽다…" 하고 중얼거렸다.
"어제도 다르지 않았어요. 순찰을 마치고 늘 앉는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자정이 넘어서는 늘 오시던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분이 한 분 오셨어요."
미소가, 천천히 걷혔다.
밀르아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다.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무서워하기 마련인데, 이 아이는 그저 어제 날씨를 옮기듯 말하고 있었다.
"따로 말씀은 없으셨고요. 조용히 옆자리쯤에 계시다가, 노래를 청하시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됐어요. 그러니 결계가 한결 편안해지더라고요. 그분도 그제야 흡족하신 듯, 조용히 자리를 뜨셨고요."
"저는 그냥, 늘 하던 대로 했을 뿐이에요."
"자, 잠깐만."
라이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어제? 여기, 본부에서?"
"네? …아, 걱정 마세요. 본부 안엔 험한 분들이 잘 안 오세요."
밀르아가 정말로 다행이라는 얼굴로 웃었다.
안엔. 나는 그 두 글자에 걸렸다. 본부 안엔 좀처럼 오지 않는다면, 그 바깥에는—
그 뒤를 잇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밀르아만이 여전히,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얼굴로 우리를 둘러보고 있었다.
밀르아가 다섯 번째 등불을 껐다. 유리 두드리는 소리가, 이번에는 유난히 작았다.
*톡.*
하나가 남았다. 정원엔 이제 마지막 주홍빛 한 점과, 사방에서 차오른 창백한 초록뿐이었다.
끄면, 다 꺼지는 마지막 하나였다.
"…어떡하지?"
라이라가 목소리를 낮췄다.
"이야기는 셰윌라가 남았는데. 셰윌라가 이야기를 하면 등불을 꺼야 하고, 그럼… 다 꺼지잖아."
"다 끄면 진짜가 온다면서요."
효리가 울상이 되었다.
"근데 마지막 하나는 끄지 말라고도 했고요. 그럼 셰윌라 님은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하는 거예요, 해야 하는 거예요?"
규칙과, 당부와, 이계의 전승이 한자리에서 서로 다른 쪽을 가리켰다. 웃자고 벌인 자리가, 어느새 아무도 풀지 못하는 매듭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 등불의 불꽃이, 그 매듭을 비추며 가늘게 떨었다.
바로 그 예민해진 순간이었다.
효리의 눈길이 먼저 밀르아 쪽으로 흘렀다. 무엇을 본 것도 아닌데, 시선이 그 언저리에 잠깐 붙들렸다가 스스로 떨어졌다.
그러고는 어깨가 작게 움찔했다. 다음에 올 것을 미리 안 사람처럼.
그리고 라이라가, 참다못해 물었다.
"밀르아. 너 아까부터… 뭘 보는 거야?"
밀르아가 곤란한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눈을 떴다.
밀색 눈동자에 금빛이 천천히 번졌다. 촛농이 스미듯, 눈동자 바깥에서 안쪽으로.
밀르아에게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이 있었다. 그 눈이, 지금 열렸다.
「 성안 」
밀르아의 시선이, 비어 있는 정원 구석을 찬찬히 훑고 지나갔다. 아무도 없는 곳을. 방석을 넓혀 둔 자리를. 먼지가 귀를 세운 채 앉아 있는 그 언저리를.
눈동자가 허공의 한 곳 한 곳을 짚어 갈 때마다, 나는 그 눈이 무엇을 세고 있는지 알 것 같아 등줄기가 곤두섰다.
"…처음부터 계셨어요."
밀르아가 아주 작게 말했다.
"우리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부터, 쭉. 듣고 계셨어요."
"말하면 다들 무서워하실 것 같아서요. 그리고…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자리인데, 이야기를 들으러 오신 분들이 계셔도 이상하진 않다고 생각했어요."
정원의 시간이 잠깐 멈췄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 등불의 불꽃만이, 우리가 아닌 다른 쪽을 향해 조용히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정적을 깬 것은, 비명이 아니었다.
"…몇 분이나 계신데?"
라이라였다.
무서움을 밀어낸 자리에, 뜻밖의 것이 들어와 있었다. 손님을 맞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에? 어, 그게… 세 분? 네 분? 자꾸 바뀌셔서…"
"그럼 자리가 모자라잖아!"
효리가 벌떡 일어나 방석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울상이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괜찮아요! 여기 앉으세요, 여기도요!"
'괜찮아요'가, 처음으로 저 자신이 아니라 남을 향해 나가고 있었다.
유라가 말없이 일어났다. 화로 곁에, 사람 수보다 하나 더 엎어 두었던 그 잔을 바로 세우더니, 김이 오르는 차를 따랐다.
이제야 알았다. 그 잔은 예비 잔이 아니었다.
유라는 먼 길을 나설 때마다, 돌아오지 못한 이의 몫으로 잔을 하나 더 둔다고 했다. 언젠가 흘리듯 들은 이야기였다. 늘 비어 있던 그 한 잔이, 오늘 밤에는 자리가 되었다.
츄니티가 수첩을 펼친 채 물었다.
"실례지만… 몇 분인지, 성함을 여쭤도—"
"츄니티, 그건 좀."
라이라가 말렸다.
나는, 마지막 하나 남은 등불을 보았다.
이야기를 하면 등불을 꺼야 한다. 그러나 이 마지막 하나만은 남겨 두어야 한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지킬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제 차례죠."
내가 말했다.
"이야기 대신, 기록을 읽을게요. 오늘 밤의 기록이요."
무릎 위의 수첩을 펼쳤다. 종이에서 밤새 밴 잉크 냄새가 옅게 올라왔다.
오늘 저녁부터 적어 온 것들이 거기 있었다. 미지근한 돌바닥, 라이라의 여름 풍습, 여섯 개의 등불, 세 번씩 끊긴 거울 이야기, 이레마다 나오던 장갑, 능선의 불빛.
나는 그것을 한 줄씩, 소리 내어 읽었다.
읽는 동안, 마지막 등불의 불꽃이 흔들렸다.
바람은 없었다.
내가 한 대목을 끝낼 때마다, 꼭 그 박자에 맞추어, 불꽃이 한 번씩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누군가 듣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세어 두는 버릇이, 오늘은 처음으로 무서운 것을 세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섭지만은 않았다.
적어 두면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늘 그렇게 믿어 왔다.
오늘 밤엔 하나를 더 알았다. 들어 주는 사람이 있는 한, 이야기는 그 사람 안에도 남는다는 것을.
기록을 끝까지 읽었다. 그러나 나는 등불을 끄지 않았다.
"셰윌라, 이야기 끝났는데. 안 꺼?"
라이라가 물었다.
"규칙은 이야기가 끝나면 끄는 거였죠. 그런데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나는 마지막 등불 곁에 손을 모았다. 유리 너머의 온기가 손바닥에 얕게 닿았다.
"들어 주시는 분들이 계신 한, 오늘 밤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요."
마지막 등불 하나를 켜 둔 채, 우리는 자리를 정리했다. 주홍빛 한 점이 창백한 초록 한가운데서, 작지만 또렷하게 타올랐다.
"…돌아갈 길, 밝혀 주는 거구나."
라이라가 등불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마지막 하나는 끄지 말라던 거, 그래서였나 봐."
"저, 다음엔 이야기 말고… 그냥 자리만 넉넉히 펴 둘래요."
효리가 방석을 하나 더 매만지며 말했다. 이제는 웃으면서.
밀르아가 정원 구석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누구에게 하는 인사인지, 이제는 다들 알았다. 유라가 채워 둔 잔에서는 아직 김이 옅게 올랐고 그 김이 마지막 등불 쪽으로 천천히 흘러가 흩어졌다.
나는 수첩에 오늘 밤의 마지막 줄을 적었다. 이번에는, 나에 관한 것도 한 줄 남겼다. 무서운 이야기를 하러 모였다가, 무섭지 않은 것을 하나 배우고 돌아간 밤이라고.
여름밤 공기가, 처음으로 서늘하지 않고 시원했다.
이튿날 아침, 등불을 돌려주러 대서고로 갔다. 벽이란 벽마다 책이 빼곡한, 성역에서 가장 큰 서고였다.
낮에도 밤에도 한결같은 유리 천장의 빛은, 정원의 밤빛과는 결이 달랐다. 그 고른 빛 아래에서 밤의 등불들은 어쩐지 낯설어 보였다. 어젯밤 그토록 또렷하던 주홍빛이, 아침에는 그저 식은 유리 조각 같았다.
츄니티가 수레의 등불을 상자에 옮겨 담다가, 손을 멈췄다.
한 번 세고, 다시 세었다.
"…일곱 개예요."
빌린 것은 분명 여섯 개였다. 어젯밤 츄니티가 하나씩 짚어 가며 두 번이나 센 여섯. 이 사람은 수를 잘못 세는 법이 없었다.
우리는 대출 장부를 확인했다. 오래된 종이에서 마른 먼지 냄새가 풀썩 올랐다. 빌려 간 개수를 적는 칸에는, 처음부터 정갈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일곱.
잉크는 이미 오래전에 말라, 종이에 깊이 스며 있었다. 그 옆 빈칸은,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채였다.
츄니티가 아주 건조하게 말했다.
"…저는, 수를 잘못 세지 않는데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젯밤, 우리는 손님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차를 따라 주고 돌아갈 길까지 밝혀 주었다. 세 분인지 네 분인지 자꾸 바뀐다던 그 손님이,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 끝내 아무도 이름을 대지 못했다.
등불은, 하나 더 늘어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수첩에 적었다. 답을 적을 칸은, 비워 두었다.